얼마 전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나쁜 놈, 추악한 놈, 좋은 놈'이란 영화 프로그램에 눈길이 갔습니다. 나도 어느새 옛날 영화를 좋아하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옛날에 본 듯 하기도 하고 안 본 영화 같기도 했지만 아무튼 끝까지 보게 됐습니다. 내용이야 권선징악의 상투적인 옛날영화였으나 영화제목이 재미있어서 그냥 본 듯 합니다.

살아오면서 되풀이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사람 사는 사회에는 언제 어디서나 '나쁜 놈'이 있고 '추악한 놈'이 있으며 '좋은 놈'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 1960년대 초에 군생활을 했는데 최전방의 어느 포병부대에 배치됐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포대 내 병장들이 모두 한 초등학교 출신의 동향친구들이었습니다. 밤만 되면 그들의 세상이었습니다. 어느 하루밤도 편할 날이 없었지요.

온 부대원이 "저놈들만 제대하면…" 부대에 평화가 오리라고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도 그런 염원이 가장 절실했던 사람들은 아마도 바로 아랫기수 상병들이 아니었나 기억합니다. 드디어 그 병장들이 제대하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부대 내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화는 며칠을 가지 못했습니다. "저놈들만 제대하면"을 함께 기원했던 그 상병들(그때는 병장이 돼 있었지만)이 그 병장들이 하던 짓을 되풀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달쯤 지나자 새로운 수법까지 동원해 '쫄병'들을 괴롭혔습니다. 악명높던 '병장들시대'가 되레 그리워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군대에만 있는 게 아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사회집단에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누구에게나 야성(野性)이 있거나 폭력성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야성이 발현될 환경이 아니거나 보다 더 큰 야성 앞에서 잠재해 있다가 그것이 발톱을 내밀 환경이 되면 튀어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금동서에 '나쁜 놈'은 늘 있어

그런데 신영복 교수의 '담론'에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감옥에도 그런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담론'에 나온 장면을 잠깐 옮기면 "어느 감방이든 '싸가지 없는 사람이' 반드시 한명씩 있습니다.(중략) 우리는 그 친구의 출소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게 됩니다. 드디어 그 친구가 출소하고 나면 참으로 행복한 밤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행복한 날도 며칠뿐, 어느새 그런 사람이 또 생겨납니다…"

신 교수의 결론은 당사자인 그에게 그만한 결함이 없지는 않지만 감옥이라는 혹독한 상황이 그런 공공의 적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진단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칼럼에서 언급했던 일입니다만 1980년대 베네수엘라 폭동 때와 1990년대 초의 로스 엔젤리스(L.A.) 폭동 때의 경험입니다. 평소 아주 평범하게 살던 착한 소시민들이 기본 질서가 무너지자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소련권이 무너지고 발칸반도에서 이른바 '인종청소'의 내전을 겪은 한 아주머니의 회고입니다. 바로 이웃 동네에 살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 가족의 일부뿐 아니라 동네의 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악마로 돌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정작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내전이 끝나자 그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동네를 돌아다니며 살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왜 '나쁜 놈'이 있는 것일까요. '추악한 놈'이 없는 세상은 없는 것일까요. 불행하게도 그런 세상은 없었습니다. 태평성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좋은 놈'이 지켜

신은 왜 이런 세상을 만들었을까를 모두들 한번쯤 생각해 봤을 것입니다. '나쁜 놈'이 혹시 세상에 긴장을 조성해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긴장은 사회의 동력이 됩니다. '나쁜 놈'을 막아내기 위한 에너지입니다. '나쁜 놈'이 있어 좋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추악한 놈'의 역할도 없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6.25전쟁을 어려서 경험한 세대로 무슨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게 소신입니다만 전쟁이 나라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미국은 짧은 역사에 비추어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입니다.

동양이 유럽에 뒤지게 된 결정적 배경에는 불행하게도 중국대륙에서 원(元)-명(明)-청(淸)으로 불과 두번의 내전이 있는 동안 유럽에서는 250여회의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나쁜 놈'얘기를 하다 전쟁론까지 비화 됐습니다만 그래도 이 세상에는 '좋은 놈'이 더 많고 세상은 그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