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준 임의적 발권, 통화정책에 경제 망쳤다' 인식 확산

"수년 내 대공황 이상급 침체 불가피 … 금이 유일대안"

삶이 팍팍해질수록 새로운 경제이론이 주목받게 마련이다. 이전의 낡은 경제이론도 마찬가지다. 금본위제(Gold Standard)는 돈과 관련한 가장 오래된 이론 중 하나로, 미국을 중심으로 최근 집중조명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블룸버그통신은 17일 "금과 직접 교환할 수 있는 태환화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제 금본위제를 되살릴 때가 됐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전했다.

반세기 전만 해도 각국 시중에서 유통되던 화폐량은 금고에 보관된 금괴의 양에 따라 제한됐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 흐름이 바뀌었다. 특히 2008년 이후 선진국 통화정책은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돌아섰다. 중앙은행이 성장의 군불을 때기 위해 발권력을 크게 확장했기 때문이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의 다음 수순으로 여겨지고 있는 '헬리콥터머니'는 그같은 추세의 정점이 될 전망이다.

중앙은행의 독자적 발권력에 의존하는 현재의 통화제도가 혜택보다 위험이 더 크다고 보는 사람들은 금본위제를 이상적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 점차 금본위 지지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뉴욕 소재 바클레이스캐피털 이코노미스트인 조세 허위츠는 블룸버그에 "비주류였던 금이 점차 주류가 되고 있다"며 "금본위제는 좋지 않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만, 점차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1970년대초까지 약 1세기 동안 지속됐던 금본위제로 완전히 복귀하는 건 사실상 힘들다. 이 제도의 열렬한 지지자들도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제학자 대다수는 "만약 금본위제를 시행, 연준으로부터 통화공급 재량권을 빼앗는다면 미국 경제는 훨씬 악화될 것"이라며 "시도조차 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블룸버그는 17일 "하지만 이같은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 경제상황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면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궁지에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로선 연준보다 더 나은 통화기구를 상상하긴 어렵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부유층이 선호했던 금본위제가 포퓰리즘적 인기를 얻는 상황은 많은 이들을 당황케 하고 있다. 금본위 지지자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연준이 찍어낸 막대한 화폐는 월가 금융권으로만 흘러들어갔다"며 "반면 대부분 미국인들은 혜택을 입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따라서 연준의 손발을 묶을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금본위제 복귀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준의 방만한 발권력을 일정 정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보수진영의 양대 싱크탱크 중 한 곳은 케이토연구소 통화금융대안센터 소장 조지 셀긴은 블룸버그에 "지나간 역사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며 "한번 깨지면 다시 붙일 수 없는 달걀처럼, 금본위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제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연준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없는 통화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연준이 찍은 화폐, 월가만 배불려

미국의 금본위 지지자들에게 현재의 대선국면은 놓칠 수 없는 호기다. 연준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다. 민주당 대선경선후보인 버니 샌더스는 지난 1월 뉴욕시 강연에서 "월가 금융권을 감시, 감독해야 할 연준이 오히려 월가의 포로가 된 현재의 상황을 좌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샌더스를 지지하는 노벨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는 연준의 양적완화 정책이 소득불평등 문제를 더 크게 악화시킨 통화정책이라고 지적한다.

금이나 은, 기타 기준에 통화를 연동시켜야 한다는 사람들은 공화당에 훨씬 많다. 이들은 분배문제를 비판할 뿐 아니라 금·은 등 본위화폐와 태환이 불가능한 '법정불환화폐'라는 개념 자체를 반대한다.

최근 공화당 대선경선을 포기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지난해 후보토론회에서 "연준은 경제를 쥐어짜는 짓을 멈추고 가치가 흔들리지 않는 화폐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금과 태환되는 통화제도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공화당 대선후보로 유력시되는 도널드 트럼프 역시 지난해 3월 뉴햄프셔 지역TV방송에 출연해 "미국은 한때 금본위제에 기반한 매우 튼튼한 나라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은 금본위제로 돌아갈 수 없는 나라"라며 "금은 더 이상 미국에 없고, 다른 나라들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현실을 인정한듯, 트럼프는 지난주 인터뷰에서 "연준이 돈을 찍어 미국 정부의 막대한 부채문제를 해결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달러기축국으로서 돈을 찍어 돈을 갚겠다는 것으로, 금본위 지지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방 단위에서 금본위 지지자들에 힘을 보태는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바클레이스 이코노미스트 허위츠는 "공화당 하원의원이 있는 지역의 유권자들은 점차 금본위제 또는 기타 귀금속과 연계한 통화제도에 대한 지지를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공화당 정치인들이 금본위제에 찬성을 보내는 건 아니다.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 재임시절 재무부와 백악관 관료를 지낸 토니 프래토는 블룸버그에 "금본위제는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제도"라며 "역사적으로 보면 금본위제는 사상 최악의 대공황과 디플레이션을 이끈 주범"이라고 말했다.

현재 워싱턴 소재 금융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프래토는 "통화정책은 경제학 원리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문"이라며 "그 때문에 중앙은행들이 만만한 타깃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연준을 정조준하는 대표적 움직임은 '연준을 회계감사하라'(Audit the Fed) 운동으로, 켄터키주 상원의원인 랜드 폴이 주도하고 있다. 랜드 폴의 아버지인 론 폴 전 텍사스주 하원의원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금본위제 지지자다. 트럼프와 샌더스 후보 역시 연준의 재무제표를 감사해야 한다는 입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금본위제 미국은 강한 나라였다"

금본위제 복귀를 주장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연준의 임의적인 발권력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는 주장은 여기저기서 나온다.

케이토연구소의 셀긴 소장은 '시장통화주의'(market monetarists)로 불리는 학파의 개념을 찬성한다. 시장통화주의는 통화공급량은 한 나라 경제의 전체 소비증가율 목표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테일러준칙도 있다. 중앙은행은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에 맞춰 금리를 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워싱턴의 많은 정치인들이 테일러준칙을 지지하고 있다. 테일러준칙에 따라 연준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수많은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미시간주 민주당 의원이자 하원 금융서비스소위 위원장이기도 한 빌 후이젠가는 "금본위제로의 복귀 얘기는 실생활에서보다는 학술적 차원에서 나오고 있다"면서도 "전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놀이를 즐기듯 각종 통화정책을 실험하는 현재의 상황은 억제돼야 하며, 이를 위한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기 '부와 빈곤'이라는 저서를 통해 레이거노믹스의 기반을 마련한 미래학자 조지 길더는 금본위제 개념을 다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글로벌 통화시장에 매일 수조달러의 유동성이 흘러넘치는 상황은 자본주의를 엽기적으로 남용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실물경제의 활력을 빼앗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길더는 중국 등의 나라에서 희망을 찾는다. 금의 가치를 되찾는 방향으로 경제를 운용하고 있다는 이유다. 그는 "중국은 통화조작국이라는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다"며 "하지만 중국이 원하는 것은 통화조작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통화가치 보존"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중국은 향후 금의 디지털버전인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이용해 통화가치를 지키는 방향을 선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금본위제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급속히 퍼지는 현재의 상황은 파멸의 서곡이 아니냐는 분위기를 풍긴다. 금본위 지지자들은 '현재의 글로벌 경제상황은 대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예금자 저축 줄어들면 정치적 반란길더는 마이너스금리로 인해 땀흘려 번 예금자들의 저축이 실제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하면 정치적 반란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투자그룹 '웨스트쇼어펀드'의 머니매니저이자 '새로운 금본위제' 저자인 짐 리처즈는 "연준과 선진 각국 중앙은행들은 막대한 돈을 찍어 재무제표를 늘려왔는데, 그 도가 너무 지나쳐 이제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구제금융 협상에 참여했던 리처즈는 "1998년 월가는 한 곳의 헤지펀드를 구제금융했고, 2008년 연준은 월가를 구제금융했다"며 "2018년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선진국 중앙은행들을 구제금융하는 일만 남았다"고 예견했다.

그는 "1930년대 대공황보다 훨씬 심각한 경제침체가 수년 내 올 가능성이 100%"라며 "우리들은 금본위제와 관련한 이야기를 앞으로 훨씬 많이 듣게 될 것"라고 장담했다.

금본위제(Gold Standard) = 순금 1온스 = 391.20달러(1993년 기준)라는 식으로 통화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연계시키는 화폐제도다.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금본위제는 화폐와 금과의 등가관계를 유지시키는 방법에 따라 금화금본위제도와 금핵금본위제도(금지금본위제도·금환본위제도) 등으로 나뉜다.

금화금본위제에서는 금화를 실제로 유통하고, 자유롭게 만들고 녹이는 것을 인정한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 광범위하게 실시된 제도다. 금핵금본위제도는 자국내 거래에서 금 대신 은행권이나 지폐 등 경제적이고 편리한 화폐를 유통시키고 금은 중앙에 집중 보유하는 제도다. 화폐를 금괴와 태환하게 되면 금지금본위제도라 하고 금환으로 바꾸게 되면 금환본위제도라 한다. 금지금본위제는 1925년 4월 영국에서 채용됐고 그 후 많은 나라가 이를 따랐다.

금환본위제는 금본위국, 특히 국제금융 중심국에서 발행된 금환을 중앙은행 등이 매매함으로써 화폐단위와 금과의 등가관계를 유지하는 제도다. 미국은 1944년 브레턴우즈체제를 통해 '금 1온스=35달러'로 정하는 금환본위제도(달러환본위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달러를 대규모로 찍어내면서 통화 가치가 떨어졌고,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금태환 포기를 선언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