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20일 지났다. 그는 많은 행정명령을 발동하고 공격적인 트윗을 날리면서 전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반이민조치에서부터 XL키스톤 송유관 승인, 이란에 대한 적대적 태도 등에서 엿볼 수 있는 건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 어젠다, 즉 백악관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이 표현한 대로 '국민경제학'(national economics)이다. 지금까지 주요 목표대상은 중국과 독일로, 대미 무역흑자가 막대한 나라들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백악관이 준비하고 있는 건 '환율전쟁'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이라는 목표를 제외하면 미국이 노리는 건 유로존 국가와 유로화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유로존의 핵심은 독일이다(내일신문 2017년 1월 24일 1면 '트럼프, 나프타·TPP 이어 EU 겨냥', 12면 '유럽에 제국주의 세력다툼 부활' 참조). 미국의 저명한 전략 경제학자인 F. 윌리엄 엥달은 9일 자신의 블로그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트럼프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극심한 두통을 느끼고 있다"며 "미국이 유로화 붕괴를 통해 유럽연합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유럽 내 제국주의적 갈등을 심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다음은 그의 글 전문.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 국가무역위원회 위원장인 피터 나바로는 "독일이 미국과 유럽 나라들을 착취하기 위해 크게 저평가된 유로화를 활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유로존 핵심국가인 독일이 사실상 '환율조작국'이라고 말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

앙겔라 메르켈 독 총리.

하지만 나바로가 말하는 환율조작은 1999~2002년 유로화의 탄생 그 자체다. 그는 "유로화는 사실상 도이체마르크처럼 기능하고 있다"며 "달러 대비 저평가된 유로화 덕분에 독일은 무역상대국들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이 격하게 반발한 건 당연했다. 메르켈 총리는 즉각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정책은 협정에 따라 유로존 내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관리된다"며 "본질상 ECB는 독립적이기 때문에 독일이 원한다고 해서 유로화를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유럽연합(EU) 28개국 중 19개국이 포함된 유로존에서 독일의 영향력은 비할 데 없이 막강하다. 이는 하루이틀 내 이뤄진 게 아니라 1990년대 유로화 창설을 구상할 때부터 기획된 것이다.

환율조작과 무역이득 등에 대한 이같은 내용이 무미건조한 경제학적 설명처럼 들리겠지만, 그 이면에는 중기적 목표로서 사실상 유로존 붕괴를 꾀한다는 워싱턴의 어젠다가 숨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아이러니한 것은 독일이 유로화 창설에 격하게 반대했다는 점이다. 1991년 12월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 EU의 전신)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의 정상들은 2년 뒤 EU출범에 합의했다. 동시에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는 이 합의문에 '1999년 말까지 완전한 통화동맹을 이뤄야 한다'는 내용을 집어 넣어 독일측을 당황케 만들었다. 당시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이에 크게 반대한 인물이다.

독일의 지위를 다음 세기까지 확보하라

유럽의 통화동맹을 원하던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는 동시에 통일독일의 막강한 경제력을 두려워했다. 강력한 통화인 도이체마르크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중앙은행 분데스방크를 어떤 식으로든 길들여야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독립적기구인 ECB였다. 독일은 수개월 간 치밀한 검토를 한 끝에 결국 이를 승낙했다. 대신 유로존에 가입하려는 나라들이 이른바 '마스트리히트 기준'을 통과하도록 했다. 이는 공적채무가 국내총생산(GDP)의 60% 이내여야 하며 연간 재정적자가 GDP의 3% 이내여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분데스방크 총재였던 한스 티에트마이어가 임의적으로 부과한 혹독한 조건이었다.

당시 나는 금융부문 기자였다. 그때 상황을 면밀히 지켜볼 수 있었다. 운좋게도 1990년대 초 덴마크 출신 EU집행위원이었던 헤닝 크리스토퍼슨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당시는 마스트리트조약이 논의되던 때였다. 그는 자크 들로르 EU집행위원장 아래서 EEC의 경제와 통화정책을 책임지고 있었다. 따라서 유로화의 탄생과 관련한 물밑 논쟁과 갈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1994년 크리스토퍼슨은 영국 런던에서 열린 EU금융회의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유로화 도입에 대한 콜 총리의 태도가 1991년과는 180도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91~94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거대은행들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생존의 기로에 서 있었다. 영국 은행들 역시 부동산시장 발 부채위기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독일의 막강한 금융권에 도전장을 내밀 나라가 없었다. 사실상 독일 은행들이 유럽 신용시장과 자본시장을 호령하던 상황이었다. 크리스토퍼슨은 당시 "도이체방크를 필두로 독일의 거대 은행들이 콜 총리를 집요하게 설득했다"며 "단일통화인 유로화가 도입된다면 독일은 다음 세기까지 유럽의 제1국 자리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였다"고 말한 바 있다.

런던 회의 직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금융관련 회의가 열렸을 때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3년 전 유로화 도입에 손사래를 치던 콜 총리는 이제 유럽의 금융권 수장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유로화는 '전쟁 없는 유럽'이라는 우리의 꿈을 실현할 핵심 도구"라고 말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는 노련한 웅변가였다. 결국 유로존과 유로화는 독일이 주도한 창조물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독일의 대미 자동차 수출 행태를 집중 공격했다. 미국 밖에서 BMW를 만들어 미국 내수시장에 판매할 경우 35%의 징벌적 고율 관세를 물릴 수 있음을 시사했다. 독일의 반응은 다소 엉뚱했다. 고차원적 외교게임을 벌이는 미국에 "미국산 자동차는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진다"고 응수한 것. 독일 경제장관인 지그마르 가브리엘은 '쉐브레와 같은 미국 차를 더 구매하라고 압력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미국에 더 좋은 차를 만들라고 말하겠다"고 답했다.

국가무역위원회 위원장인 나바로의 대 독일 전략의 목표는 상대적으로 품질이 떨어지는 미국 차를 독일에서 더 많이 팔기 위한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 결함투성이인 유로체제를 파산시키겠다는 것이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위협하는 잠재적 경쟁통화이기 때문이다.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 성립 이후 미국의 패권은 군사력과 달러로 지탱돼 왔다. 달러 패권의 의미는 미국의 적자를 외국이 영원히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바로-로스의 전략백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캘리포니아 경제학 교수인 나바로와 사모펀드자문이자 억만장자 투자자인 윌버 로스는 캠프 경제전략수석을 맡았다. 이들은 힘을 합쳐 트럼프 후보를 위한 경제전략 백서를 펴냈다. 이 백서에 나온 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범대서양무역동반자협정(TTIP) 폐지, 북미자유협정(NAFTA) 재협상 등을 선언했다. 독일을 '환율조작국'이라고 집중 공격하는 것 역시 그 둘의 전략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나바로는 국가무역위원회를, 로스는 상무부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독일이 유로화를 통해 부당하게 이득을 얻고 있으며, 반대로 미국과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스 프랑스 등이 손실을 감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의 잠정적 결론은 유로존의 해체다.

취임 4일 전 트럼프는 런던타임스와 장시간 인터뷰했다. 그는 "EU와 독일을 보라"며 "이는 기본적으로 독일을 위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이어 "독일과 EU국가들은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등에서 백만명 이상의 검증되지 않은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다"며 "이들을 수용하도록 강제되지 않았다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투표 가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는 "브렉시트는 낙타 등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지푸라기(final straw)가 됐다"며 "다른 나라들도 영국의 뒤를 이어 EU를 떠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나바로는 지난해 9월 29일 공개한 백서에서 "유럽의 통화체제에 문제가 있다"며 "유로화가 국제통화시장에서 자유롭게 변동하는 상황에서, 도이체마르크가 여전히 현존하는 것처럼 독일에 유리한 상황이 계속 펼쳐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유로존 내 남부 국가들이 허약하기 때문에 유로화 가치를 낮추고 있다"며 "독일의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데도 미국과의 교역에서 대규모 흑자를 보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그는 "대규모 환율조작 때문에 국제 통화질서에 구조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바로는 이같은 상황을 반전시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트럼프 후보는 통화를 조작하는 모든 나라에 대해 '환율조작국'이라는 딱지를 붙여 엄벌할 것임을 공약했다"며 "미국은 통화조작을 멈추지 않는 나라에 대해 보복적인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역할을 맡는 곳은 미 재무부다. 독일을 공식적인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해 제재를 가하기 위해서는 재무부 규정상 1년 이상의 협상과 검토 과정이 필요하다. 설전이 난무하는 현재의 상황은 독일을 코너로 몰아넣을 링을 설치하는 단계다.

반유로화 전선을 통합하라

미국의 주 EU대사로 지명된 테드 맬럭 영국 레딩대 교수는 지난 5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유로화 붕괴에 돈을 걸겠다"며 "유로화를 팔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그는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는 '그렉시트'가 발생할 개연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도 맬럭은 EU를 역사속으로 사라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에 빗대며 "EU를 길들일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적의를 드러냈다. 맬럭은 "유로존은 18개월 내 붕괴할 것"이라며 "유로화는 이미 사망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내가 올해 해야 하는 일은 유로화를 내다파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럽 정치경제에 문외한이 아니다. 영국 국립종합대학인 레딩대 경영학 교수다. 세계경제포럼(WEF) 이사회 중역이기도 하다. 미국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인 '아스펜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따라서 유로화와 EU의 미래에 대한 그의 발언은 정교하게 계산된 것이다.

17년간 골드만삭스에 몸 담았던 재무장관 스티븐 므누신도 유로화 붕괴를 노린 미국의 전면적 환율전쟁의 무대를 차근차근 설치하고 있다. 우연인지 계획적인지 모르지만 그가 몸 담았던 골드만삭스는 2002년 초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을 도왔던 은행이다. 당시 그리스 재정적자는 GDP의 12%를 넘었다. 3% 이내 규정을 맞출 수 없었지만 골드만삭스가 나섰다. 통화스와프 파생상품 거래를 통해 그리스 정부의 재정적자를 장부에서 감춰준 것. 야바위 거래와 다름없었다.

그리스 재정위기 실체는 2010년 수면 위로 부상했다. 당시는 미국의 재정 적자가 예년 수준을 크게 뛰어넘어 전 세계의 우려를 높이던 때였다. 미 국채를 말없이 떠안아주던 중국마저 "미 국채를 던질 수도 있다"고 압박했다. 골드만삭스와 미 재무부가 그리스 재정위기를 고의적으로 증폭시켜 달러 대비 유로화의 가치를 폭락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지점이다.

브렉시트로 유로존과 EU의 존립이 역사상 최대 위협을 맞은 가운데 골드만삭스와 트럼프의 새 행정부가 힘을 합쳐 유로화의 붕괴를 부추기고 있다. 그같은 전략이 성공한다면 유럽은 1930년대 대공황보다 더한 금융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영국 경제사학자인 해롤드 제임스는 지난 3일 포린폴리시에 게재한 '독일을 겨냥한 트럼프의 환율전쟁이 EU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제하의 기고문에서 미국이 유로화를 붕괴시키려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유로화 체제가 깨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미국의 경쟁자인 단일조직 EU의 힘이 약해지는 것은 물론 세계대전을 낳은 제국주의적 다툼이 유럽 내에서 다시 부활하게 된다"고 결론 내렸다. 독일 정치권이 트럼프가 잇따라 내놓는 정책을 보며 극도로 긴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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