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명 철공소 직원에서 금속노련 위원장에 … "민주노총은 개혁 도와준 우군"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어용'으로 지탄받던 한국노총을 더욱 위기에 빠뜨렸다. 전국적인 신규노조 결성과 노조민주화 봇물은 한국노총 개혁을 요구했다. 이 시대적 요구에 앞장선 사람이 박인상(79) 전 한국노총 금속노련 위원장이다.

1987년 국민들은 '직선제 개헌'를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노총은 전두환정권의 '4·13 호헌조치를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성명은 노총민주화의 시발점이 됐다. 6월항쟁 뒤 전국적인 노동자대투쟁으로 확산되자 한국노총도 개혁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7·8월 노동자 대투쟁 속에 결성된 노조들이 속속 지역협의체를 만들고 '제2노총'을 지향해 나가면서 한국노총 내부에도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기류가 강하게 자리를 잡아 갔다. 이 열기는 15명의 부산 대평철공소 출신인 박인상을 한국노총 금속노련 위원장 당선으로 이끌었다.

사진 노사발전재단 제공

◆박정희 시절 구속경력, 평생동지를 만나다= 경남 사천출신인 박인상은 부산 영도에 있는 대한조선기술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59년 당시 국영기업체로 선박을 만드는 대한조선공사(조선공사)에 입사했다. 1963년 군 복무를 마치고 조선공사에 복직해 정밀기계 공구실을 담당하던 어느 날 절삭공구가 분실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절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해고됐다.

다음해 9월 박인상은 전국해원노조 조선공사지부(조공지부) 박정부 부지부장의 제안으로 상근 실무자인 상무(전문위원)로 들어갔다. 그는 노동법, 단체협상 등 각종 노조실무를 익혔다.

1965년 박인상은 본공(정규직)이 아닌 임시공(비정규직)으로 복직됐다. 조선공사지부는 '본공과 임시공을 하나로 묶는다'는 전략으로 임시공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였다.

1968년 11월 초 조선공사는 민영화됐다. 민영화된 경영진은 11월 29일 임시공 1175명에게 해고예고 통보를 했다. 2000여명의 본공과 임시공은 쟁의신고도 냉각기간도 거치지 않고 즉각 파업에 들었다. 권오덕 조직부장과 박인상 청년부장이 파업을 이끌었다. 파업 15일째가 되자 조합원들은 집단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단식 3일째 노사는 '임시공 해고예고 철회와 처우개선'에 합의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1969년이 되자 회사는 합의사항인 '임시공 처우개선'을 지키지 않았다. 조공지부는 조합원 99% 찬성으로 8월 1일 또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는 8월 19일 직장폐쇄를 단행하고 노동위원회 승인없이 출입구를 봉쇄했다. 박인상이 정문 자물통을 부숴 공장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9월 18일 정부는 사상 최초의 긴급조정권을 발동했다. 긴급조정을 거부하기 힘들었던 조공지부는 50일간의 파업을 풀었다. 박인상 등 조합원 가족 2명을 포함해 27명이 주거침입, 기물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박인상은 1970년 3월 1심 판결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해 가을 그는 15명 규모로 선박엔진을 수리하는 대평철공소에 들어갔다. 부산 영도에는 대평철공소처럼 작은 철공소 노동자들이 가입한 한국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 직할 영도철공분회가 있었다. 박인상은 이곳에서 사무장으로 노동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1976년 부산지역지부 사무국장이 된 박인상은 40여명이 모인 전국금속노조 사무국장 교육에 참여했다. 조선공사 파업으로 구속된 그의 경력을 알고 개혁적인 사무장들이 호감을 보였다. 그는 이때 1980년대 금속노조 개혁의 '평생동지'들을 만났다.

◆'어용' 노조에 충격, 한국노총 개혁에 앞장서다 = 1980년 봄을 맞아 금속노조, 화학노조, 섬유노조 등의 개혁세력이 한국노총 집행부 퇴진을 요구했지만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주저앉았다. 신군부는 노조정화 조치를 내리고 노조간부 1500여명을 쫓아냈다. 한국노총 위원장, 산별노조 위원장 등 12명이 저항 한번 못하고 자진 사퇴했다. 게다가 신군부는 12월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노동관계법을 개정했다. 유니언숍 제도가 폐지되고 산별노조도 기업별 체계로 바꿨다. 3자개입 금지 조항도 이때 신설됐다.

박인상은 금속부산지역연락협의회 초대 의장과 한국노총 부산시협(부산지역본부) 사무국장을 겸임했다. 1983년 12월 대우정밀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박인상 등은 노조결성을 도왔지만 회사의 회유와 기관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어렵게 만든 노조를 해산했다. 대우정밀노조는 '불발'로 끝났지만 정부는 노조를 설립하려는 노동자들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1984년 서울 구로공단 협진양행노조 결성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금속노련 사무실로 몰려와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금속노련의 신변보호 요청으로 경찰이 농성 중이던 해고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이 일로 금속노련 사무실이 대학생들로부터 돌과 화염병세례를 맞았다. 실망스런 일이 또 발생했다. 경남 진주 대동중공업노조가 단체협약 갱신을 요구하며 파업 중이었다. 금속노련 간부가 이석행 위원장에게 전화해 "지금 어느 때인데 파업이냐. 당장 파업을 집어치우라"고 소리쳤다. 박인상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금속노련을 개혁하기 위해 위원장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1985년 4월 금속노련 임원선거가 있었다. 금속노련의 주류는 대기업노조였다. 작은 조직 출신인 박인상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새로운 인물이 돼야 한다는 흐름은 3파전으로 시작한 선거를 결선투표까지 이르게 했다. 경인지역 개혁세력이 힘을 보탰으나 그는 10표차로 떨어졌다.

◆선거에서 민주노조계열 도움도 받아 = 박인상은 1988년 5월 금속노련 위원장에 재도전해 당선된다. 물론 노동자대투쟁의 힘이 배경이 됐다. 어려움도 많았다. 개혁에 대한 열기는 높았지만 노동자대투쟁 뒤 노조가 설립됐거나 민주화로 집행부가 바뀐 노조들은 상급단체에 가맹비를 내지 않은 곳이 많았다. 가맹비를 내지 않으면 대의원을 배정받지 못했다. 개혁파 후보로 출마했지만 정작 자신을 지지할 대의원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박인상은 민주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석행 대동중공업노조 위원장과 문성현 통일중공업 해고자가 나섰다. 그들은 지역협의체인 마창노련(마산창원노동조합연합) 등 지역협의체에 가입한 노조위원장들에게 금속노련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선거참여를 호소했다. 마창노련은 운영위원회를 열어 금속노련에 밀린 가맹비를 납부하기로 결의했다. 금속노련과 거리를 뒀던 울산 현대그룹 노조도 움직였다. 금속노련에서 두번째로 대의원수가 많은 현대자동차노조도 합류했다. 27일 325명의 대의원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금속노련 임원선거에서 40표 차이로 박인상이 위원장에 당선됐다.

박인상 위원장은 출마하면서 결심한 것이 있었다. 첫째가 정정당당한 싸움은 끝까지 지원한다. 둘째 부당노동행위가 일어난 현장에는 조직을 붙인다. 셋째 조합원과 유리된 노조는 개선시키는 현장중심주의를 실천했다. 그는 금속노련 위원장을 세차례, 한국노총 위원장을 두차례 연임했다.

그는 금속노련 위원장 시절 한국노총 최초의 옥외집회를 열었다. 한국노총 위원장 시절엔 50년 만에 민주노총과 공동 총파업을 벌였고 정책연합을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노사정위원회 설립에 합의했다. 그후 박인상은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 노사발전재단 비상임 대표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심각하다.

50년전 대한조선공사에도 본공(정규직)과 임시공(비정규직)이 있었다. 1963년 173명이던 임시공은 1967년 1348명으로 8배나 늘었지만 같은 기간 본공은 1051명에서 877명으로 오히려 줄었다. 당시도 본공이 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노조는 '임시공의 본공화'를 연례행사처럼 요구했다. 가장 큰 하청청부회사(현 파견업체)를 몰아낸 적도 있다. 임시공도 조합에 가입시켰다. 다만 본공화도, 격차도 점진적으로 진행했다. 이런 노력은 자연히 본공과 임시공 사이에 선후배 의식이 생겼다. 본공은 후배을 위해 양보할 수 있었고 임시공은 본공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는 조선공사노조의 힘을 키웠다. 비정규직을 같은 노동자로 보고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해야 한다.

 대기업과 하청업체간 격차도 심하다.

한국노총 위원장을 하면서도 조기분회(엣 영도철공분회) 조합원이었다. 5명에서 60명 규모의 작은 철공소 노동자들이 가입한 조직이다. 1989년 이상범 현대자동차 위원장 취임식에 초청받은 자리에서 '노동자는 하나다. 부품업체 노동자들과 공동투쟁을 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2만명 조합원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금속노련 위원장일 때 대기업의 방해로 흐지부지됐지만 지역별로 대기업노조 간부와 하청업체가 만나는 자리도 마련했다. 대기업노조가 조금 양보하고 하청노동자의 처지, 하청단가 후려치기 등 산업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치기 위해 하청업체와 함께 싸우고 정부에 개선책을 요구해야 한다.

 노동자대투쟁이후 산하 조직이 탈퇴했다.

노조운동이 경쟁체제가 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마창노련 후배가 '금속노련만으로 한국노총을 변화시키기 어렵다'며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내부에서도 '박인상이 금속노련을 끌고 전노협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엉뚱한 의혹도 있었다.

한국노총 안에서 커진 개혁세력, 변화가 두려운 보수세력의 부조화, 밖으로는 민주노총이라는 경쟁자가 출현해 50년 동안 누려온 한국노총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었다. 한국노총을 개혁하는 데 있어 중요한 원칙은 전통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노총에 대한 부정은 나에 대한, 조합원에 대한 부정이다. 민주노총이 한국노총 개혁을 가장 많이 도운 '우군'이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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