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보도 저널리스트 웨인 매드슨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로저스는 임기(1969~1973년) 내내 '바지저고리'에 불과했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했다.

닉슨 대통령은 국무부를 불신해 백악관이 외교의 전권을 쥐고자 했다. 로저스 이후 가장 권한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렉스 틸러슨 현 국무장관이 임기를 이어갈지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주무르는 실세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워싱턴 백악관을 떠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헌법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는 대통령이라기보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재위 41~54년)를 닮았다고 미국전문기자협회(SPJ) 소속 탐사보도 저널리스트인 웨인 매드슨이 분석했다.

매드슨은 7일 온라인매체 '스트래티직컬처' 기고문에서 클라우디우스와 트럼프 대통령의 유사점을 비교했다. 그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1세는 트럼프처럼 인생 후반기에 권력을 쥔 인물이다. 46세가 돼서야 조카이자 폭군황제였던 칼리굴라를 보좌하는 집정관이 됐다. 트럼프는 부동산과 카지노, 오락산업에서 일하다 60대 후반에 정치에 입문했다. 트럼프처럼 클라우디우스 역시 정치 입문 전 운에 좌우되는 게임에 빠진 마니아로, 화려한 여성편력가로 이름 높았다. 클라우디우스는 4명의 아내를, 트럼프는 3명의 아내를 맞았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검투사들의 목숨을 건 끝장내기 결투나 이륜전차 경주를 즐겨봤고, 트럼프는 프로레슬링과 권투를 즐겨본다. 클라우디우스처럼 트럼프 대통령 역시 명망 높은 식자를 곁에 두지 않는다.

클라우디우스는 서기 43년 남부 잉글랜드를 침공해 병합했다. 전쟁에 이기긴 했지만, 로마의 통치를 섬나라 잉글랜드까지 확장한 건 무리수였다. 이는 결국 자신의 몰락을 재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조지 W. 부시나 버락 오바마가 애용한 '정권 교체'(regime change) 전략을 쓰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네오콘(공화당 중심의 신보수주의자) 참모들의 영향에 굴복해 결국 입장을 바꾸고 있다.

클라우디우스는 4번째 부인 아그리피나의 정치적 계략에 휘말려 삶을 마감했다. 아그리피나는 자신이 데려온 아들에게 대권을 쥐어주기 위해 남편을 독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아들이 바로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네로 황제다. 매드슨은 "클라우디우스의 독살 부분에서 트럼프와의 유사성은 끝이 난다"며 "하지만 트럼프의 백악관에서 벌어지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정치적 암투는 역사상 그 어떤 궁정 비화보다 흥미롭다"고 적었다.

매드슨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을 둘러싼 측근들의 위험천만한 조언을 따르고 있다. 중동지역이나 무슬림 국가들의 관계와 관련해 트럼프 참모들은 미 행정부 역사상 전례없는 적대감을 갖고 있다. 이 참모들은 문고리권력으로 불리는 유대인 3인방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 트럼프재단 전임 수석법률보좌관이자 현 백악관 국제협상 특별대표 제이슨 그린블랫, 한때 트럼프가 고용했던 로펌의 대표이자 현 주이스라엘 대사인 데이빗 프리드먼이다.

트럼프와 이들 3인방은 70년 역사를 지켜온 미국의 중동외교를 정반대로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팔레스타인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미국은 자국 대사관을 현 소재지인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로 했다.

트럼프의 결정은 전 세계 무슬림을 단결시키고 있다. 무슬림은 예루살렘을 메카(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출생지)와 메디나(무함마드의 사망지)에 이은 3대 성지로 간주한다. 무슬림뿐 아니다. 동방정교회나 개신기독교 역시 예루살렘을 가장 신성한 도시로 여긴다. 때문에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동관리하거나 아니면 과거 탕헤르나 단찌히, 트리에스테처럼 국제자유도시로 존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트럼프의 결정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의 뺨을 때린 격이 됐다. 이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증오범죄의 표적이 된 지 오래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베푼 곳으로 유명한 예루살렘 성내 베네딕트수도원 벽에는 '이스라엘의 적인 이교도 기독인들에게 죽음을" "기독인들은 지옥에 빠져라" 등의 문구들이 히브리어로 쓰여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기독교인에 대한 증오범죄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과 달리 이제 '정권 교체'를 입에 올리고 있다.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자마자 트위터를 통해 "이란 폭압정권의 종말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란핵합의를 폐지하길 원한다'고 밝힌 직후의 트위터다. 이란핵합의 폐지는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란 내 반정부 시위는 미 중앙정보국(CIA)을 이끌고 있는 마이크 폼페오 국장 등 시오니즘(유대민족주의) 추종자들이 이란 내 CIA정보원들을 통해 이란 정부의 경제실정에 대한 국민의 불안과 반감을 부추기면서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새해 벽두부터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뿐 아니라 파키스탄에 대한 공격을 도발적 언사를 감행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무슬림 국가 중 유일한 핵무기보유국가다. 트럼프는 파키스탄에 대한 예산지원금 2억5500만달러를 보류시켰다. 파키스탄이 아프가니스탄 내 이슬람 테러리스트 조직에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매드슨은 "하지만 트럼프가 무슬림 국가인 이란과 파키스탄을 공격대상으로 삼은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라며 "예루살렘을 이스라엘로 넘겨주면서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2국가해법'을 무너뜨린 데 대한 안팎의 비판이 거세진 것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파키스탄 비난은 주 유엔 미국대사인 니키 헤일리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헤일리 대사는 기독인이자 시크교인(힌두교의 개혁파)이다. 그의 부모는 인도 출신이다. 헤일리는 트럼프 행정부의 친인도, 반파키스탄 외교정책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에 대량살상무기 이전을 승인한 것도 헤일리의 강한 입김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트럼프는 2016년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공화당 정강에서 대량살상무기 이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넣겠다"고 공언했지만, 말짱 헛소리가 되고 말았다.

파키스탄 외무장관인 카와자 아시프는 트럼프의 트윗 공격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와 이란에 대해 공격을 하는 것은 자국 내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단순한 정치적 목적의 수사는 아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 파키스탄에 대해 공격적 언사를 감행하는 건 시오니스트 3인방인 쿠슈너와 그린블랫, 프리드먼뿐 아니라 카지노재벌인 셸던 아델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워싱턴을 기웃거리는 극우 지지세력에게 던진 메시지이기도 하다. 즉 조지 부시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처럼 CIA가 은밀히 주도하는 정권교체 외교전략을 채택하겠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정권교체 전략은 이란뿐 아니라 베네수엘라에서도 시행되고 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대해 전면적 경제, 정치전쟁을 선포했다. 미국 비자 발급을 금지하고 각종 제재를 통해 경제를 옥죄고 있다. 부시와 오바마 행정부가 차베스 사회주의 정권에 대해 취했던 것과 같은 전략이다.

매드슨은 "문제는 클라우디우스와 달리, 트럼프에겐 생존을 보장해줄 강력한 정치적 근위병들이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는 공화당 기득권 내에 친구보다 적이 훨씬 많다. CIA나 연방수사국(FBI), 군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공화당 잠룡들은 2020년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대회에서 트럼프에 도전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올해 중간선거가 끝나면 공개적인 흐름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중간선거에서 의회 주도권은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갈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매드슨은 "결국 트럼프는 클라우디우스와 마찬가지로, 신경쇠약증에 걸리게 될 것이며,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집착과 강박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럼프의 정책으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면, 네오콘들은 트럼프를 늙은 절름발이 짐수레말처럼 취급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네오콘들은 또 다른 목적 수행을 위해 새로운 후보군을 밀어올릴 것"이라며 "유엔대사인 니키 헤일리나 부통령 마이크 펜스, 아칸소주 공화당 상원의원 톰 코튼이 대표적"이라고 예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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