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시민 품으로' 약속 안 지켜
인력·예산 줄이고 사실상 방치해
영화 ‘1987’을 계기로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숨진 이 곳은 영화의 주된 배경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점도 관심을 받는 이유다.
그러나 누군가 그런 역사적 의미를 느끼려 현 경찰청 인권센터(옛 남영동 대공분실)를 찾는다면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4층에 위치한 작은 박종철기념전시실과 5층에 위치한 3평 남짓한 옛 조사실(509호)을 제외하고는 경찰 홍보관 느낌이 물씬 나기 때문이다. 김근태 전 의원도 이 곳에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고문 받았던 515호실은 옛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경찰이 아닌 시민사회가 운영해 ‘인권의 메카’로 키워야 한다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김학규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15일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만났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사회가 운영하는 인권기념관으로 바꿔 달라는 국민청원을 넣었는데.
경찰이 현재 이 곳을 운영하고 있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이기 때문에 경찰은 애초에 이 건물을 없애 버리려고 했었다. 남산의 안기부나 국군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을 없애버린 것처럼 흔적을 없애려 한 거다. 다행히 경찰의 그런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 곳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찰이 운영하다 보니 민주화 과정의 아픈 역사가 잘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경찰을 홍보하는 내용만 더 잘 드러나게 내부가 설계돼 있다.
■ 2005년에도 남영동 대공분실을 인권기념관으로 만들자는 요구가 있었는데 경찰이 일부 부응했던 것 아닌가.
당시 그런 여론이 일자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기자회견을 했었다. 그래서 대공분실 기능을 홍제동으로 옮기고 경찰청 인권센터를 세운 것이지만 이후 12년간의 운영을 보면 엉망이다.
건물 4층을 보면 박종철 기념전시실보다 2배는 더 넓은 경찰 인권기념관을 꾸며 놨다. 안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 당시 표창을 받은 경찰 관련 내용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경찰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을 못하고 있는 거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이니만큼 훼손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건물 앞 철문이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검은색 철문이었는데 이를 안이 들여다 보이는 흰 색 철문으로 바꿔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또 박종철 열사가 죽은 509호실을 제외하고 5층의 다른 조사실은 다 리모델링을 해서 예전 모습을 남겨두지 않았다. 김근태 전 의원이 전기고문을 당했던 칠성판(전기고문을 할 수 있는 받침대) 등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 당시에 시민사회와 함께 논의해서 이 곳을 운영하기로 했던 건가.
시민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방안으로 경찰청 인권위원회를 당시 만들었다. 노무현정부 시절에는 경찰청 인권위원회가 경찰청 인권센터 운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했지만 정권이 바뀐 이후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경찰의 시위 진압에 반발해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들이 모두 사퇴를 했다.
이후로는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들이 인권과는 별 상관 없는 인물로 채워져서 경찰청 인권센터 운영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아 점점 소외됐다.
■ 경찰은 박종철 기념전시실 등을 평일에만 개방하다가 토요일에도 개방하기로 하는 등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하던데.
지난해부터 토요일에 개방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당시 단계적으로 개방확대를 추진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올해에는 일요일과 공휴일에도 개방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경찰에게 물어봤더니 예산과 인력이 없어서 못 한다고 하더라. 그러면 단계적으로 개방을 확대하겠다는 이야기는 왜 했는지 모르겠다.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경찰에게 12년간이나 기회를 준 셈이지만 경찰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는 방향으로 운영하거나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쪽으로 노력하기는커녕 인원도 축소하고 현상유지에 급급한 상황이다.
근본적으로는 경찰이 정말로 과거사를 제대로 반성하고 싶다면 옛 남영동 대공분실 운영에서 손을 떼야 한다. 그게 전제가 되지 않으면 모든 대책이 무의미하다. 그래서 관리주체가 경찰에서 국가인권위원회 등으로 변경되어야 한다고 본다. 경찰이 계속 운영하게 되면 이 정권 동안에는 잠시 나아질지 몰라도 2005년 사례처럼 정권이 바뀐 후에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 시민사회가 운영하면 어떻게 달라질까.
인권을 탄압한 대표적 공간이기 때문에 그런 상징이 온전히 드러나야 한다. 박종철 열사뿐만 아니라 김근태 전 의원 등 이 곳에서 고문을 당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드러나야 한다. 전기고문·물고문의 역사,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 등 기획전시할 수 있는 부분도 훨씬 다양할 것이다.
그런 전시가 이루어진다면 사람들이 여러 번 찾아와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게 되지 않겠나. 이 곳에서 탐방안내를 자주 하는데 고문피해자 분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했던 어떤 분이 이 곳을 방문했는데 올 때만 해도 덤덤하게 왔는데 막상 이 곳에 오니 심장이 뛰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면서 울면서 자신이 고문피해자라는 걸 이야기하더라. 자신이 고문당했던 곳을 마주하는 것도 고문피해자들에겐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다.
박종철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2일 ‘경찰이 운영하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사회가 운영하는 인권기념관으로 바꿔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원(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78392)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후 활발한 캠페인 활동을 펴고 있다.
김 사무국장은 “영화 1987이 상영되는 개봉관을 찾아서 시민들에게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아직도 경찰이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시민사회가 운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직접 알리고 있다"면서 "옛 남영동 대공분실 앞이나 경찰청 앞 등에서 1인시위를 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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