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찬반 의견 조명

1983년 미국 재무부 국채 3개월물 수익률은 평균 9%에 육박했다. 최근 10년 평균 0.7%에 비교하면 '어마무시한' 수준이다. BoA메릴린치에 따르면 83년 당시 국채 투자원금을 2배로 불리려면 8년 남짓 묻어두면 됐다. 하지만 현재 수준의 수익률로는 반세기 이상 묻어둬야 한다.


위의 예시는 채권시장의 극적인 변화를 드러낸다. 지난 30여년 동안 채권 수익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해왔다. 바꿔 말하면 채권 수요가 공급보다 월등한 강세장이 이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채권시장 활황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금융위기의 파괴적 여파를 막기 위해 700여차례에 걸쳐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더불어 수조달러에 이르는 채권매입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이제 값싼 돈이 범람하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며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올해 본격적으로 금융시장에서 손을 떼는 수순을 밟아나갈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각국 정부와 기업, 은행들이 즐겨찾는 50조달러 규모의 글로벌 채권시장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BoA메릴린치 최고투자전략가인 마이클 하트닛은 FT에 "오랜 기간 중앙은행들이 채권시장 강세장을 이끈 큰손으로 군림해왔다"며 "하지만 이제는 '대긴축'(Great Tapering)으로 태세를 전환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국채시장 전반에서 일어난 집중 매도세와 채권계 거물 2명이 잇따라 약세장을 예고하면서 시장의 우려감은 커지고 있다. 핌코 창업자이자 야누스 핸더슨 대표인 빌 그로스는 미국채 10년물 수익률이 2.5%를 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채권시장 약세장을 선언했다. 더블라인캐피털의 제프리 건들락은 "채권시장이 약세장에 들어섰다는 건 섣부를 수 있지만, 중앙은행 통화정책이 '양적긴축'(Quantitative Tightening)으로 선회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큰 충격을 주게 된다. 단지 투자자에게뿐만이 아니다. 채권시장은 글로벌 금융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톱니바퀴다. FT는 "채권시장이 흔들린다면, 경제와 금융 전반이 들썩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물론 채권시장 활황세의 종말론은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해 많은 경제, 금융 전문가들이 채권에 부정적 전망을 내놨다. 하지만 오히려 글로벌 채권시장은 1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익을 투자자에 안겼다. 블룸버그 바클리스 글로벌 종합채권지수에 따르면 지난해 채권투자자들은 7.4%의 수익을 얻었다. 하지만 올해도 지난해와 같은 짭짤한 수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게 대다수의 예상이다.

그러나 많은 투자자들은 채권시장의 약세장을 장담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인플레이션을 억누르는 '인구구성 변화'와 '기술발전' 등의 요소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다. 주지하다시피 채권시장은 인플레이션과 길항 관계다.

'PGIM채권' 선임 포트폴리오 매니저인 그레고리 피터스는 FT에 "채권 강세장은 끝나지 않았다"며 "시장이 과잉반응을 하고 있다. 큰 흐름이 아직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미 보스턴 소재 투자그룹인 '루미스 세일즈'의 세계 최장수 채권 매니저인 댄 퍼스는 최근 자신이 굴리는 130억달러 규모의 채권펀드 중 1/3 이상을 현금과 단기 국채, 우량등급 회사채로 옮겨놓았다. 1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액수다.

퍼스는 최근 금융전문가들과의 만남에서 "밸류에이션(기업가치평가)이나 정치, 기술 등과 관련한 많은 요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때에 채권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한다"며 "채권에서 수익의 기회를 잡기에 좋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내내 채권 매도세가 지속돼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을 3% 이상 밀어올리게 될 것"이라며 "더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수년 동안 금융시장은 풍족하고 값싼 돈의 세례를 맛봤다. 연방준비제도(연준)가 2014년 기존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축소하기 시작했을 때, 일본중앙은행은 반대로 더 큰 규모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에 돌입했다. 연준이 이듬해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했을 때 유럽중앙은행(ECB)은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씨티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각국 중앙은행들은 1조5000억달러 규모의 채권을 사들였다. 2011~2016년 기간 연평균 매입액 1조2500억달러보다 더 컸다.

하지만 이제 투자자들은 기존 흐름이 반전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연준은 지난해 자산 축소에 돌입했다. 이달부터 ECB는 채권 매입액을 기존의 절반으로 줄인다. 전문가들은 ECB의 양적완화가 올해 말 종료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올해 말이 되면 10년 만에 처음으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채권시장에서 서서히 퇴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주 10년만기 미 국채 수익률이 9개월래 최고치인 2.6%로 오르면서 채권시장에 한 차례 큰 소동이 일었다. 일본중앙은행이 장기채권 매입 규모를 줄인 것으로 확인된 데다 중국 인민은행이 미국채 매입을 줄일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일본중앙은행은 10년만기 국채 수익률을 0%로 유지하기 위해 향후에도 필요한 만큼의 채권을 매입할 방침이지만, 그 규모를 줄여나갈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 점만으로도 글로벌 채권시장이 충격을 받기에 충분했다. 'PGIM채권'의 피터스는 "중앙은행의 입장이 약간만 변해도 채권시장은 화들짝 놀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중앙은행이 서서히 손을 떼는 상황에서 올해 시장에 공급되는 신규 국채 물량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미국과 유럽, 일본, 영국 등 중앙은행들은 신규발행 물량보다 약 1700억달러 더 많은 액수의 채권을 사들였다. 하지만 BNP파리바는 "시장은 올해 6000억달러 채권을 흡수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투자자들의 또 다른 잠재적 위험성은 올해 인플레이션이 마침내 오를 것이냐 여부에 있다.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미국의 10년 만기 '물가연동국채' 수익률은 최근 2%를 넘었다. 지난해 3월 이후 처음이다. FT는 "최근 국제유가의 상승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 해도 11주 연속 물가연동국채에 대한 유입액이 많은 점을 보면 시장에서는 올해 인플레이션 상승이 가시화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일부 전문가와 투자자들은 중앙은행들의 양적완화 종료가 국채시장보다는 주식시장과 회사채시장에 더 큰 악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씨티은행 전략가인 매트 킹은 "연준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은 디플레이션 두려움을 해소하면서 오히려 국채 수익률을 올렸다"며 "반면 연준이 2013년 양적완화를 끝내겠다는 계획을 밝혔을 때 처음엔 충격을 받았지만 이후 국채 수익률은 급락했다"고 지적했다. 그의 언급은 주식과 회사채 등 국채보다 더 위험한 자산들이 중앙은행의 채권매입 흐름에 훨씬 민감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은 잘못된 것에 흥분한다"며 "기업가치평가가 너무 부풀려져 관련 시장이 과거에 비해 훨씬 취약해졌다"고 말했다.

실제 채권시장은 양적완화 이전이나 금리인상 단행 시기에도 강세를 보이곤 했다. 금융사이클의 흐름이나 자금의 유입유출보다 장기적 요인에 더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구고령화는 전 세계적으로 채권시장에 대한 선호도를 크게 높였다. 안정적인 저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효과를 냈다. 게다가 가파른 기술발전 속도는 전 세계 산업 전반에서 디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파생상품 계약을 보면 투자자들은 향후 10년 만기 미국채 수익률이 3% 아래에 있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독일과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 선물은 각각 2%, 1% 아래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채권시장의 약세장 전환에 반신반의한다는 의미다.

지난주 미 국채 10년물과 30년물에 대한 경매에서 투자자들의 강한 수요세가 형성됐다. 채권시장에 대한 중국과 일본발 충격을 상쇄했다.

채권왕이라 불리는 빌 그로스 역시 채권 약세장에 대한 자신의 앞선 예상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CNBC 인터뷰에서 "10년 만기 미국채 수익률이 올해 말 2.7%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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