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전쟁 리카즈 "통화정책 정상화 나선 연준, 이도저도 못하는 딜레마 봉착"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여전히 필립스곡선에 의존하고 있다. 필립스곡선은 실업률이 낮아지면 인플레이션이 오른다고 예측하는 모델이다. 미국 실업률은 현재 4% 근처로 17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따라서 연준은 인플레이션이 본격 상승하기 전 통화정책을 긴축모드로 전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통화전쟁' '화폐의 몰락'의 저자인 제임스 리카즈는 금융블로그 '데일리 레커닝' 기고에서 "필립스곡선은 물론 연준이 주장하는 미국 경제의 건강함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며 "이를 근거로 통화정책 긴축에 나선 연준은 1929년 대공황 발발을 전후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리카즈에 따르면 1960년대는 필립스곡선처럼 실업률이 낮은 반면 인플레이션이 높았다. 1970년대 후반엔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높았다. 2010년대엔 낮은 실업률과 낮은 인플레이션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는 건, 인플레이션과 통화공급 사이에 연관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인플레이션이란 심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사람들이 특정 화폐를 불신하게 되면, 유통속도가 크게 높아진다.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는 화폐를 쥐고 있으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리카즈는 "연준이 긴축으로 선회한 또 다른 표면적 이유는 미국 경제가 탄탄한 성장국면에 있다는 공식적인 자신감"이라며 "필립스곡선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말 기준 미국의 저축률은 2.4%였다. 1970~2000년 평균 6.3%에 비해 1/3 수준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안, 연방정부의 재량적 지출 한도 폐지, 치솟는 학자금대출 체납 등의 상황으로 미국의 재정적자는 해마다 1조달러를 넘게 될 전망이다. 만성적으로 벌이를 초과하는 지출에다 그같은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 저축률은 제로를 향해 가고 있다.

리카즈는 "이는 미국이 투자를 줄이거나 해외에서 더 많은 자금을 빌려와야 한다는 뜻"이라며 "어느 쪽이든 경제 성장에 부정적"이라고 진단했다. 미국 재무부는 향후 10년 간 신규 채권 발행을 통해 10조달러를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가 촉발한 무역전쟁과 이민제한, 높아지는 실질금리는 또 다른 역풍이 될 전망이다. 여기에다 트럼프 행정부 이전부터 존재했던 구조적 장기침체 요인, 즉 인구학적 변화와 디레버리징, 생산성 저하 등의 요인은 여전하다.

연준은 공개적으로 장밋빛 시나리오를 폐기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같은 성장 걸림돌을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연준은 왜 경제체력이 약한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강행하는가. 리카즈는 "다음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단언한다. 증거는 확실하다는 것. 미국 경제를 침체에서 끌어올리려면 보통 기준금리를 3~4% 인하해야 한다. 하지만 연준은 3%도 인하할 수 없다. 연방기금금리가 2%도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준은 경기침체가 오기 전 기준금리를 인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침체가 닥쳤을 때 위기에서 벗어날 무기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연준이 현재진행중인 자산축소도 마찬가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연준의 자산규모는 4조5000억달러까지 늘었다. 부풀어오른 자산을 시급히 줄여놓아야 4차 양적완화(QE)가 필요할 때 다시 자산을 늘릴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연준의 자산축소 작업은 금리가 3%에 이르기 전 경기침체가 닥쳤을 때 쓰고자 하는 사전예방적 조치다. 연준은 기준금리를 제로로 낮춘 뒤 양적완화를 다시 쓸 것이라는 주장이다. 연준은 자산을 무한정 부풀릴 능력이 없다. 물론 법적 제한이 있는 건 아니다. 심리적 저항선이 있기 때문이다. 연준의 자산규모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다는 의미다. 리카즈는 "연준이 그 경계를 쉽사리 허문다면, 연준에 대한 대중의 신뢰와 달러에 대한 전 세계의 신뢰는 박살나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연준의 자산규모 확대 한계가 5조달러인지 6조달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경계를 넘게 되면 즉각적이고 사후적으로 알게 될 뿐이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는 게 리카즈의 지적이다. 연준 자체와 달러에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연준이 긴축적 통화정책에 나선 이유는 다음 위기가 닥쳤을 때 달러에 대한 신뢰를 허물지 않고 완화정책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최대 관건은 경기침체를 자초하지 않고도 통화정책을 긴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리카즈는 "지난 10년 간의 경험으로 보면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올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상황에 따른 연준의 대응책을 나눠 분석했다. 우선 금리인상과 양적긴축이라는 이중처방이 실물경제를 둔화시키고 주식 등의 자산거품을 꺼뜨리는 한편 달러가치를 높이고 디플레이션을 끌어들이는 경우다. 이런 흐름이 명백해지면 일자리 창출은 힘들어질 것이다. 고용주들이 비용절감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증시조정으로 주요 지표가 30% 정도 하락하는 약세장을 연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럼프 행정부가 촉발한 무역전쟁, 미국 부채규모에 대한 우려, 점차 강화되는 이민 규제 등으로 전 세계 경제가 둔화할 것이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 있다.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는 '기술적 경기침체'가 뒤따를 것이다. 리카즈는 "물론 이런 상황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하지만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경기확장 국면, 역대 최장 기간의 증시 강세장이 막을 내리는 것은 확실하다"고 지적했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보다 복잡할뿐더러 결과도 더 끔찍하다. 연준이 과거 2가지 실수를 되풀이하는 시나리오다. 연준의 첫째 실수는 1928년 증시거품을 꺼뜨리기 위해 시장에 개입한 것이다. 이는 대공황으로 직결된 실수였다. 둘째 실수는 1937년엔 너무 일찍 통화정책 정상화에 나서면서 대공황 국면을 연장시켰다.

연준은 지난해말까지도 자산거품을 부정하거나 또는 자산거품에 개입해야 한다는 견해를 배격했다. 1928년 경험에 기반한 입장이었다. 거품 제거에 나섰던 연준은 1929년 10월 시장 대붕괴를 촉발했고 이는 그 유명한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이후 연준의 입장은 거품은 스스로 꺼지게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 필요하다면 통화완화정책을 써 상황을 수습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본다.

하지만 2007년 모기지(부동산담보대출) 시장의 거품 붕괴는 상상 이상의 재앙이었다. 연준은 당초 계획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모험적인 수습책을 써야 했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다.

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연준은 수습책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자산거품을 줄이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되 보다 세밀하게 조정된 미묘한 말과 행동을 취한다는 것.

'1928년 입장'을 다시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연준의 새로운 견해는 지난해 11월 1일 금리결정기구인 '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에 등장했다. 이후 몇몇 연준 관료들이 공개적으로 그같은 입장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자산 거품과 관련해 '새로 부각된' 우려를 근거로 연준은 지난해 12월 13일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연준의 새로운 접근법에 저항이라도 하듯, 미국 증시는 이후 급격한 조정국면을 겪었다. 지난 2월 2~8일 미 증시는 갑작스레 고꾸라졌다. 리카즈는 "연준이 자산거품을 줄이려 한다면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알리는 전조였다"며 "상황에 따라 1929년에 버금가는 충격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이럴 경우 충격은 미국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통화긴축정책에 따른 달러 강세는 달러 표시 부채를 가득 지고 있는 신흥국 내 위기를 증폭시킬 수 있다. 이는 결국 글로벌 유동성 위기로 번지게 된다.

대공황 극복을 위해 완화정책을 쓴 지 8년 만인 1937년, 연준은 때 이른 긴축으로 기술적 경기침체를 촉발했다. 대공황의 여파는 1940년까지 이어졌다. 현재의 통화정책 정상화 역시 당시 상황의 재연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2007~2018년 경제실적은 사실상 '경제침체'라는 게 리카즈의 분석이다. GDP의 지속적 하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잠재성장률과 비교해 실질성장률이 너무 낮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연준이 지난 10년 간의 비정상적 통화정책에서 정상적 정책으로 돌아오려는 건 이해가능하다"며 "문제는 연준이 쉽사리 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데 있다. 지금 상황은 연준이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통화 완화정책으로 다시 방향을 전환한다 해도 연준 딜레마를 해결해주진 못한다"며 "더 완화할수록 자산거품은 다시 팽창할 것이고 연준 자산규모는 더 늘어날 것이고, 이는 전례없는 시장 붕괴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고 지적했다.

리카즈는 "연준이 긴축을 고수할 때 최상의 시나리오는 실물경제 둔화와 30% 정도 지수가 떨어지는 증시의 약세장 정도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자산거품이 꺼치면서 50% 이상 시장가치가 증발하는 증시 붕괴가 닥치는 것"이라며 "만약 연준이 통화완화 정책으로 되돌아간다면, 자산거품은 더욱 커지고 재앙적인 붕괴로 80% 이상 가치가 폭락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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