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우회 체제에 대한 심도깊은 고민도

16~17일(현지시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유럽연합(EU) 정상회의가 열렸다. 당초 EU의 외연을 넓히는 통합의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미국 이슈가 더 많이 논의됐다. 유럽이 단합해 미국의 독불장군식 정책에 반기를 들자는 내용이다. EU는 이란핵합의를 재검토하지도, 미국의 새로운 이란 제재에 동참하지도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온라인매체 스트래티직컬처는 20일 "이번 EU 정상회담은 대서양 동맹의 역사에 한획을 긋는 만남으로 기록될 전망"이라고 전했다.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인 도널트 투스크는 EU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같은 친구랑 있으면, 적이 왜 필요하겠는가"라며 트럼프가 유럽의 친구가 아닌, 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 덕분에 유럽이 망상에서 깨어났다"며 "유럽이 새로운 미국의 제재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U 집행위원장인 장 클로드 융커도 "미국은 동맹국에 등을 돌렸다"며 "유럽이 미국을 대신해 글로벌리더 자리를 꿰차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미국은 더이상 우리와 협력하기를 원치 않는다"며 "지금이야말로 유럽이 미국을 대체할 호기다. 미국은 책임 있는 국제적 행위자로서 활기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EU 최고위급 관리들이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고 대체하자고 말하는 풍경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불가능이 현실이 되고 있다.

유럽이 미국과 선을 긋는 과정은 분노에 찬 말이나 공개적 반항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실제적 단계를 밟아야 한다. EU는 1996년 법제화한 '방어 조항'(blocking statute) 사용을 고려중이다. 유럽 기업들이 미국의 이란 제재를 따르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조항이다. 관할권을 넘어선 제3국의 법률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다.

그런 취지에서 프랑스는 이란과 사업하는 유럽기업이 미국의 제재로 피해를 볼 때 EU가 대신 보상해주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인 브뤼노 르메르는 20일(현지시간) "미국이 세계의 경제 경찰이 되는 것을 계속 용납할 것인가"라며 "답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르메르 장관은 "1996년 규정을 강화하면 유럽 기업들이 제재를 받아 치르게 될 비용을 EU가 대신 지불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란 같은 곳을 비롯해 해외투자를 모색하는 유럽기업들은 미 달러나 미 은행을 이용하기보다는 유럽 내에서 (필요한 투자)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달러체제를 우회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는 의미다.

이란을 방문 중인 EU 에너지·기후 담당 집행위원 미겔 아리아스 카네트는 19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란중앙은행에 유로화를 직접 송금하는 방법을 이란 정부에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 정부의 이란 제재를 피하기 위해 (미 은행을 거치지 않는) 유로화 직접송금 방식을 제안하고 양측이 실무 차원에서 세부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며 "직접 송금은 미국의 제재와 관련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란의 시장 규모는 4000억달러 정도다. 18조달러의 미국 시장 규모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건 미국의 도전에 맞서려는 정치적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균열은 △알루미늄과 철강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무역전쟁 △파리기후협정에서 미국의 탈퇴 △동맹국의 의견은 아랑곳하지 않는 미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비용 분담에 대한 논란 등의 사안과 겹치며 증폭되고 있다.

지난 15일 열린 'EU 회원국 국방장관 모임'도 주목할 만하다. 유럽의 독자적인 국방정책, 즉 '항구적 안보국방 협력체제'(PESCO)가 집중 논의됐다. EU 28개 회원국 가운데 23개국이 지난해 11월 공동 군사투자 프로그램인 PESCO에 서명한 바 있다. 순수 유럽국가로 구성된 '유럽 방위동맹'의 초석으로 만든다는 복안이다.

한편 미 국무부 에너지담당 차관인 샌드라 오드커크는 "유럽이 발트해를 거쳐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공급받는 '노르드 스트림 2'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한다면 유럽 기업들을 제재할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독일 등은 이에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스트래티직컬처는 "이란핵합의 파기와 노르드 스트림 2 위협은 러시아와 유럽을 뭉치게 하고 있다"며 "유럽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권리를 빼앗은 미국의 독불장군식 정책에 저항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EU 정상회의와 이후 유럽의 움직임은 미국과 유럽의 관계에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유럽은 대서양 동맹에 안녕을 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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