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선 이란핵합의 놓고 갈등하는 유럽 대국 … 슈피겔 "유럽 움직이는 나라는 독일 아닌 프랑스"

독일 주간지 슈피겔 최신호에 따르면 친유럽통합파인 독일 경제부장관 피터 알트마이어는 '미국의 이란 제재로 악영향을 받는 유럽 기업들의 피해를 보상해주겠다'는 EU 집행위원회의 방침에 적극 반대하고 있다. 그는 "미 행정부 결정에 반대하는 독일 기업들을 보호하거나 예외로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법적으로 미비하고 설익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EU 집행위원회 생각은 전혀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핵합의에서 빠지겠다고 선언한 지 9일 만에 유럽은 '방어조항'(blocking statute)을 꺼내들어 대응할 방침이다.

슈피겔은 "방어조항 카드는 독일이 원하는 시나리오가 아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알트마이어 장관이 특히 반대한다"며 "현재 EU의 행보를 주도하고 있는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원하는 카드다. 무대 뒤에서 대미 압박을 밀어붙이는 쪽은 마크롱 대통령이다. 반면 독일은 트럼프 행정부와의 대결을 회피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미국이 이란에 대해 확고하다는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대의 압박을 선호한다. 미국의 유럽 동맹국이라도 예외는 없다. 신임 독일 주재 미국대사인 리처드 그레넬은 이란 문제와 무역 이슈를 연계해 공개적으로 유럽을 압박하고 있다. 지난주 그레넬 대사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만약 유럽이 이란문제에 관해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다면, 미국은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해 유럽에 부과하려던 징벌적 관세를 철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유럽이 트럼프 대통령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무역전쟁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인 도날트 투스크는 "트럼프 같은 사람이 친구라면, 적이 왜 필요한가"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유럽 각국이 공동 보조를 취한다면 성과를 거둘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로서는 난처한 일이 된다고 슈피겔은 전했다. 독일 역시 이란핵합의를 지켜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싸움을 감수할 용의까지는 없다. 반면 프랑스는 미국과의 대결을 피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드러내고 있다. EU의 한 고위급 인사는 슈피겔에 "독일은 대미 유화책을 선호하는 반면 프랑스는 '계속 미국에 양보하다가는 트럼프 대통령이 더욱 대담한 일을 벌이도록 격려하는 일이 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다른 목소리는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독일 총리실의 입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인 데 반해 프랑스 각료들은 '미국의 처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슈피겔은 "양국의 내적 성향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며 "독일은 소심함에 움츠러들고, 프랑스는 자부심을 내세우며 꼿꼿하다"고 전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최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동맹인 강대국이 우리의 일을 결정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주권국이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오히려 이번 일을 기회로 보고 있다. 유럽연합이 진정 필요한 이유를 프랑스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는 약속을 함부로 어기는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존재는 유럽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반면 독일은 '현실정치'(realpolitik)를 강조한다. 유럽이 트럼프에 반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입장이다. 독일 관료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문제와 관련해서는 매우 강경하다고 보고 있다.

정치적 의지 부재

하지만 진짜 문제는 정치적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알트마이어 장관은 이란핵합의는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에 부과할 보복관세 위협보다 덜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이란에 대한 갈등이 대서양 간 전면적인 무역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고자 한다. 미국과의 무역전쟁은 독일 경제, 특히 자동차 산업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주요 대미 수출국인 독일은 미국이 징벌적 관세를 부과할 경우 프랑스에 비해 훨씬 큰 타격을 입는다.

프랑스 경제부장관인 브뤼노 르 메르는 이달초 "미국은 세계의 경제 경찰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외무부장관인 장이브 르드리앙은 "미국이 취한 결정들이 프랑스 기업들에 그 어떤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의를 다져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르 메르 장관은 "모든 유럽은 경제적 주권을 지키기 위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발언은 미국과의 정면대결도 불사하겠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프랑스 전 총리인 장피에르 라파랭은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 중국으로 구성된 'G4'(Group 4)를 만들어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라파랭 전 총리는 조지 부시 전임 대통령 시절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프랑스-독일-러시아 3개국 모임을 조직한 인물이다. 슈피겔은 "프랑스는 여전히 스스로를 글로벌 강대국으로 인식한다"며 "때문에 사안에 따라 동맹을 조직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프랑스의 상황은 독일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다. 알트마이어 장관처럼 대서양 관계에 헌신적인 사람들에게 러시아나 중국과 동맹을 맺어 미국에 대항하자는 아이디어는 악몽과 같은 시나리오다. 게다가 4국 동맹 구상이 미국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에도 대항하는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 현실화를 더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독일 총리실 관계자들은 이란문제에 이스라엘 변수가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이란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이스라엘의 눈치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과의 갈등 중심에는 경제문제가 있다. 프랑스의 경우 거대 석유기업인 토탈, 자동차 제조업체 푸조 등의 다국적 기업이 미국의 새로운 이란 제재에 큰 타격을 입는다. 반면 독일의 경우 미국 시장 의존도가 크지 않은 중소기업 비중이 높다. 미국 제재로 큰 피해를 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란과 계속 사업을 벌일 수 있는 기업들이다. 반면 프랑스 토탈은 최근 이란과 합작한 가스유전 발굴 사업 계획을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독일이나 프랑스 모두 이란과의 교역비중이 극히 적은 편이다. 프랑스의 수출국 중 이란 비중은 0.3%, 독일의 경우 0.2%에 불과하다.

상징적 제스처

슈피겔은 "달리 말하면 유럽 기업을 보호하려는 조치는 대체적으로 상징적이고 정치적인 효과를 가진다"며 "즉, 유럽인들이 참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여주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이는 동시에 이란에게 보여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유럽이 이란핵합의를 구하기 위해 진심을 다해 싸우고 있다는 신호다. 이란 내 개혁파들은 이란핵합의를 놓고 강경파들과 대치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의 그같은 제스처가 절실히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방어조항'(blocking statute)은 1996년 도입됐다. 이란과 리비아, 쿠바 등에 대한 미국의 제재에서 유럽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유럽 기업에 대한 제재를 보류했다. 따라서 방어조항이 실제 적용되지는 않았다.

방어조항을 꺼내든다고 해서 이란과 거래하는 유럽 기업들을 보호할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독일의 마스 외무부장관은 방어조항 카드를 꺼내 미국 행정부에 옳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낫다는 입장이다.

반면 알트마이어 장관은 방어조항 아이디어를 비판적으로 본다. 메르켈 총리실 역시 '어리석은'(absurd) 조치로 인식한다. 슈피겔은 "만약 마스와 알트마이어 장관이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다면, 방어조항 도입에 대한 EU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독일 대표는 기권을 하게 된다"며 "이는 현재 유럽을 움직이고 있는 국가가 독일 메르켈 총리가 아닌,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임을 다시 한번 인식시키는 일이 된다"고 전했다.

또 다른 대책으로 떠오른 건 유럽투자은행(EIB)이 앞장서 이란과 거래하는 방안이다. 지난해 11월 EU 외무장관들은 EIB에 부여한 위임권한 범위를 확대해 이란 내 각종 개발 프로젝트에 자금을 댈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EIB는 세계 최대 금융시장인 미국 내에서도 활동한다. 미국의 제재를 직격으로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커지는 비판

메르켈 총리에게 압박을 가하는 건 마크롱 대통령뿐 아니다. 독일 내각과 정당들도 메르켈 총리를 압박하고 있다. 최근 마스 외무장관은 프랑스 외무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유럽인은 무기력하지 않다"며 "쉽지는 않겠지만 미국에 맞설 가능성, 그를 위한 도구들이 있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가 속한 기독민주당(CDU) 소속 로데리히 키제베터 의원은 "우리는 보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며 "손놓고 앉아 방관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프랑스의 입장이 옳다"고 지적했다. CDU 소속으로 유럽의회 의원인 엘마르 브로크도 "우리는 미국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며 "강한 사람은 강한 사람을 존중한다. 트럼프는 강한 사람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 역시 강한 상대방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브로크 의원은 "모든 일에 무조건 참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며 "트럼프에 굴복한다면, 유럽에 대해서 멋대로 해도 된다는 그의 생각을 강화시켜줄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란 외무부장관인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는 최근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유럽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 독일 이란대사인 알리 마제디는 "EU와 러시아 중국이 힘을 합친다면 미국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하지 않다"며 "유럽은 미국의 보복관세에 대해 트럼프에게 단합된 힘을 보여줬다. 이제 핵합의에서도 그와 같은 단합을 보여줄 때"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