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투표 찬성 25% 그쳐

시중은행의 '부분지급준비제'(fractional reserve)를 폐지하는 혁명적 내용의 금융개혁안이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부분지급준비제란 은행이 예금을 기반으로 평균 10배 가량 많은 신용(돈)을 창출하는 현대금융의 관행을 의미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스위스는 10일(현지시간) 폴겔트(Vollgeld, 독일어로 완전지급준비제), 또는 소버린머니(Sovereign money) 법안으로 불린 제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개표 결과 스위스 국민 25%만 해당 제안에 찬성했다.

투표결과에 대해 스위스 금융권과 스위스중앙은행(SNB)은 크게 환영했다. SNB 토머스 조던 총재는 국민투표에 앞서 "폴겔트 법안은 불필요하며 위험한 실험이 될 것"이라며 "통과될 경우 스위스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당초 여론조사에서는 해당 제안에 대한 지지가 상당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스위스 직접민주주의 제도에서 10만명이 찬성하면 국민투표 제안이 통과된다.

폴겔트 개혁안의 핵심은 시중 은행의 부분지급준비제를 없애자는 것이다. 부분지급준비제는 전 세계 금융시스템의 근간이다. 예금 일부분만을 고객 인출용도로 떼어두고 나머지는 대출에 활용한다는 것이다. 즉, 지급준비율을 10%라고 했을 때 예금의 10%만 남기고 나머지 90%를 거듭 대출하면서 돈을 늘린다. 정확히 말하면 은행은 예금의 10배 만큼 새롭게 돈을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와 함께 스위스 제안법안은 SNB가 창출한 화폐를 정부 또는 국민들에게 직접 지급할 수 있게 했다. 현재는 정부의 경우 국채를 발행해 중앙은행에 맡긴 뒤 돈을 빌린다. 개인은 중앙은행이 아니라 시중은행을 통해 돈을 빌린다.


법안 찬성자들은 해당 제안이 부채를 낮추고 신용의 호황-불황 주기를 막아 금융시스템을 더 안정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화폐란 공공재이기 때문에 국가기관이 통제해야 한다"는 여론전을 폈다. 이들은 스위스 통화의 90%가 부분지급준비제에 의해 창출된 신용이라고 추산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스위스 주요 정당과 금융권은 강력히 반대했다.

스위스 국적의 글로벌 은행인 UBS의 CEO 세르지오 에르모티는 "유권자들이 해당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고 주장했다. SNB 역시 그동안 지켜왔던 정치적 중립성을 버리고 해당 법안에 강력 반대했다.

폴겔트 반대자들은 "경제성장을 뒷받침해온 금융시스템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법안"이라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동안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대폭 강화됐다"고 주장했다.

부분지급준비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은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폭발했다. 영국중앙은행 전 총재인 머빈 킹을 포함한 저명한 경제, 금융인들이 찬성을 표했다.

폴겔트 제안은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에서 등장한 개념과 유사하다. 미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1935년 부분지급준비제가 아닌, 100% 완전지급준비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완전지급준비제로 △뱅크런을 피할 수 있고 △진폭이 큰 경제주기를 완화할 수 있으며 △부채의 늪에 빠지는 걸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위스는 2년 전 기본소득제 도입과 관련해서도 국민투표를 시행했지만, 당시에도 찬성 23%에 그쳐 도입이 무산된 바 있다.

폴겔트 도입 캠페인을 벌인 측은 투표결과에 낙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캠페인 대변인인 에마 다우네이는 "금융시스템 개혁을 위한 첫 발을 뗀 것뿐"이라며 "부분지급준비제의 문제와 그에 대한 대안을 널리 알린 것 자체가 훌륭한 성과"라고 자평했다.

한편 국제통화기금(IMF)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1년까지 147개국가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아프리카 서해안의 기니처럼 소국은 물론 미국과 같은 제1 경제대국에서도 발생하는 게 금융위기다. 금융위기의 파괴력은 대단하다. 정치적 불안정은 물론 국내총생산(GDP) 감소나 공공부채 급증 등과 같은 피해를 남긴다. 2007~2009년 3년 동안 미국 GDP의 31%가 사라졌다.

FT 수석논설위원인 마틴 울프는 국민투표에 앞선 지난 7일 논설을 통해 "폴겔트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강력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울프 위원은 "은행들이 부분지급준비제를 통해 무책임하게 신용창출 기능을 남발하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중앙은행도 2014년 1분기 '현대경제의 통화창출'에서 '시중은행이 대출을 통해 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있다"며 "더 심각한 건 신용 창출이 줄어들어야 하는 때에도 은행들은 앞다퉈 대출을 늘리며 역주행한다. 이는 결국 신용의 급격한 팽창과 자산가격의 거품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물론 정부가 일정 정도 은행예금을 보호하고 유동성을 주입하거나 은행의 지급능력 등에 보증을 선다. 이 덕분에 위기 발생 회수는 줄어들었지만, 일단 발생하면 그 규모가 매우 커졌다. 2008년 위기가 대표적 사례다.

울프 위원은 "정부는 은행을 보호하고, 보호를 받는 은행은 신용창출을 남발하고, 정부는 다시 과도한 신용을 억제한다"며 "그같은 모순적 시스템은 실패를 예고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현재 주요국 금융권은 10년 전보다 레버리지를 줄였고, 보다 많은 감독을 받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여전히 은행들의 레버리지율은 20대 1에 달한다. 은행 자산 가격이 5%만 하락해도 파산한다는 의미"라고 꼬집었다.

그는 "금융시스템을 안정화하는 대안은 신용을 창출하는 은행의 능력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스위스 폴겔트 법안이 바로 그것"이라며 "비슷한 효과를 내는 방안은 신용을 창출하는 만큼의 예금을 보유하게 하면 된다. 바로 완전지급준비제"라고 설명했다.

SNB 조던 총재가 폴겔트 법안을 반대한 것과 관련, 울프 위원은 "기존 관념에 비춰보면 대단한 도전과제로 볼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정부의 핵심 속성 중 하나인 화폐창출을 민간에게 넘겨준 것만큼 어려운 도전적 과제는 아니다. 중앙은행만큼 막대한 공적권한과 민간의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는 영역은 없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