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준 법무법인 산우 변호사

법정에서 변호사가 재판장에게 언성을 높이는 순간을 볼 기회는 흔치 않다. 애초에 자기 사건의 판결을 내리는 사람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도 없다. 변호사가 판사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을, 그것도 내 사건에서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건은 성폭력에 이은 무고 사건이었다.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술자리 후 여자의 집에 같이 갔는데, 남자가 여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성관계를 치렀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그날 밤의 관계가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며 다음날 남자를 성범죄로 고소했다. 남자가 '그날 밤'의 일이 무죄라며 여자를 무고죄로 맞고소했다. 형법은 거짓으로 타인을 고소·고발하는 경우 무고죄로 처벌하고 있다.

성범죄는 중대한 범죄로 성립요건 엄격

그런데 이 두 사건은 논리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날 밤'의 진실과 '다음날'의 거짓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의 성관계가 강간이었다는 여자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진실에 기반한 고소이므로 무고가 될 수 없다. 반면 여자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여자는 무고로 처벌받게 된다.

따라서 결국 양쪽은 그날 밤의 일이 강간이었는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게 된다. 내 사건 역시 그러했고, 나는 남자를 변호하여 이미 강간죄에 관하여는 검찰의 불기소처분을 받은 상황이었다. 당연히 무고죄를 심리하는 재판부는 그날의 일이 강간은 아니었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질문할 수밖에 없었고, 여자 분의 변호인은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조금 거칠게 재판부에 항변했다. 성폭력이 얼마나 피해자에게 큰 고통인지, 성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지를. 언성은 높아졌지만 다들 놀라기보다는 재판부 대처를 궁금해 하며 법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재판장은 짧은 반문으로 법정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심각한 범죄니까, 함부로 인정 못하는 것 아닌가요?" 변호인은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대답을 이어나가지 못했고, 그날 심리는 사실상 거기서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변호인 말처럼 강간은 중대한 범죄이고, 형량도 상당히 무겁다. 그러나 재판장의 말처럼, 그래서 더더욱 성립요건이 엄격하다. 반드시 강압적인 수단이 동원되어야 하고, 그 강압의 정도는 '반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아주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

이 법리를 오해하면, '왜 피해자에게 반항했어야 한다고 의무를 부여하느냐는 피해자(사실은 피해를 주장하는 자) 중심의 프레임에 갇히는 경우가 있다. 틀린 말이다. 피해자의 반항 여부와 무관하게, 반항이 불가능한 정도의 강압이 있으면 성폭행은 성립한다. 검사나 판사가 왜 반항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은, '반항'이 아니라 '왜'를 묻는 것이다. 반항하지 않은 이유가 어차피 반항이 불가능할 정도여서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반항 자체는 가능했지만 감정적 이유라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 하지 않은 것인지를 알고 싶은 것뿐이다.

법이 인정하는 진실은 차가운 핵심일 뿐

이 사건에서, 상대 변호인은 수사관의 감정을 사로잡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 일 당시 피해자가 얼마나 불쾌했는지, 그 일이 피해자에게 입힌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호소하여 기소 의견을 받아내었으므로. 그러나 정작 의뢰인인 여자분의 답변을 통제하는 데는 신경쓰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검사가 감정적 문제를 무시하고 여성에게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예리하게 파고들자 여자는 불리한 정황들을 털어놓고 말았다. 나는 이 정황들, 즉 남자가 먼저 샤워하러 간 사이 여자는 그동안 반항이나 도피를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남자가 피임기구를 가지러 차에 다녀오는 사이 문을 잠글 수 있었다는 사실을 '항거 가능'의 근거로 제시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무고죄를 인정하였다.

표현하지 않아도 사랑인 것처럼, 드러나지 않는 반항도 존재한다. 말하지 못한 안타까움도 사랑이지만, 차마 용기 낼 수 없었던 반항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당사자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현명한 판사나 검사라도, 당사자 사이 내밀함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것이 당사자 사이에 머무르는 문제라면, 이해할 의무도 없다. 당사자 진심이 아무리 크고 뜨겁더라도, 법이 인정하는 진실은 차갑고 단단한 핵심뿐이므로. 누군가의 상처를 헤집어서라도 그것을 끄집어내 제시하는 것이 변호사의 일이다. 변호사의 승리에는 항상 누군가의 피가 묻어 있다.

이택준 법무법인 산우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