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보험사 정체성 위기"

보험료를 받아 위험을 떠안아주는 전통적 의미의 보험을 중단하는 보험사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7일 전했다.

고객의 눈높이가 높아져 기존 보험상품만으로는 고객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미 전 세계 대부분 나라의 보험시장은 포화상태다. 경쟁이 극심해 성장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보험사들은 전례없는 저금리 시대를 거쳤다. 또 새로운 자본확충 규정에 대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험의 전통적 사업모델이 휘청거리고 있다는 것.

씨티은행 분석가 제임스 슈크는 FT에 "아마존과 같은 기업이 고객의 경험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보험업계가 거대한 위기에 직면했다"며 "이제 고객들은 보험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한다"고 덧붙였다.


우선 등장한 해법은 고객에 대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 서비스를 통해 고객에게 큰 만족을 제공하면 보험사 수익이 늘고 들쑥날쑥했던 투자자 이익도 안정시킬 수 있다는 논리다.

다양한 서비스 제공을 통해 일부 보험사들은 고객을 붙잡아두고 새로운 사업을 확장하려 하는 반면 또 다른 보험사들은 고객, 투자자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영국 '스탠더드라이프'와 같은 보험사들은 보험상품을 중단하고 있다. 지난해 이 회사는 증시 보험주 카테고리에서 빠졌다. 애버딘자산운용사와 합병하면서다.

서비스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 여행보험사인 '커버모어'는 정신과 의사, 트라우마 전담 간호사를 필요한 고객에게 제공한다. 2015년 네팔 지진 때 구조됐던 호주인 리안 로이드가 해당 서비스의 혜택을 봤다. 로이드는 "내가 극적인 상황에서 떨고 있었다는 점을 배려했다는 점에서 보험사의 서비스가 매우 세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보험사 '제네랄리'는 고객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자녀를 돌봐주는 '베이비시터' 서비스를 제공한다.

상업보험을 다루는 영국 보험사 RSA는 'RSA레드'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고객들이 개인 홈페이지나 여러 사이트에 접속할 때 보안상의 문제점을 미리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난해 5억6500만달러를 주고 커버모어를 인수한 스위스 최대 보험사 '취리히'의 CEO 마리오 그레코는 고객서비스 확대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지난 수년 동안 보험업계의 아킬레스건은 '고객들은 왜 보험상품이 필요한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라며 "이제는 고객을 완벽히 이해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된 이유는 보험회사에 대한 고객 충성도를 높이는 것. 대체적으로 보험사에 대한 고객 충성도는 낮다. 그레코는 "고객들은 보통 10~15개의 보험을 들고 있는데, 같은 회사에서 2~3개 이상의 상품을 계약하는 건 드문 일이다. 그만큼 고객 충성도는 낮다"며 "하지만 바꿔 말하면 성장할 수 있는 거대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전략이 주효하다는 증거가 있다. 브라질 보험사인 '포르투 세구로'는 수십년 동안 고객에 대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자동차 주차와 수리, 주택배관 점검 등이다. 서비스에 대한 투자로 회사 수익은 높아졌다. 지난해 포르투 세구로는 보험상품 판매로 약 2억735만달러의 순이익을, 서비스 제공과 관련해 약 3600만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

컨설팅 전문사 베인앤드컴퍼니는 "포르투 세구로는 고가의 보험상품을 파는 곳인데, 점점 시장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며 "사람들은 세구로가 공격적으로 홍보하는 각종 서비스에 매료되고 있다. 기꺼이 돈을 내려 한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모든 보험사가 높아만가는 고객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외도'를 감행하는 건 아니다. 일부 회사는 서비스로의 전환이 보험금 지급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보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고객이 무엇을 하는지 모니터하는 일이 예전보다 쉬워졌다. 이는 보험상품 가격을 산정할 때 유용하다. 뿐만 아니라 고객들이 보험금을 청구해야 하는 사건 사고들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조언하는 데도 효과가 크다. 씨티은행 분석가 슈크는 "나쁜 일이 생겨 돈을 쓰는 대신, 미연에 방지하는 게 더 이익"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보험사 제네랄리는 고객의 자동차에 경고박스를 넣어준다. 고객의 운전이 서투를 때 불빛으로 경고하는 용도다. RSA와 '아비바'는 고객의 집에 가스누출 탐지키트를 설치해준다.

생명보험사인 '바이탤리티'는 고객들에게 잘 먹고 효과적으로 운동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고객이 활동량과 운동, 음식, 몸무게, 수면 등을 추적하는 스마트기기 '핏빗'을 착용하고 여기서 산출된 정보를 보험사와 공유할 경우 최대 60%까지 보험료를 할인해준다.

서비스를 통해 기존 보험업을 보충하는 것을 넘어, 완전 새로운 수익창출원으로 삼는 보험사들도 있다.

재산보험이나 상해·사망보험을 취급하는 '악사'는 추가 매출을 노리는 기업 중 하나다. 악사 혁신팀장인 기욤 보리는 "보험 서비스와 관련한 최대 문제 중 하나는 고객들이 돈을 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따라서 서비스 제공은 자칫 '돈먹는 하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의 관심사는 ‘서비스 자체로 수수료를 받거나 서비스를 통해 회사성장을 가속화하는 등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악사의 스타트업 기업인 ‘카메트’가 최근 개발한 서비스 ‘퀘어’는 가치 창출을 위한 새로운 시도다. 매달 일정액을 내면 휴대폰 영상통화를 통해 프랑스 의사에게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보리 팀장은 “사업을 다각화해 고객과 정기적으로 교감하는 접점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재보험사들도 동참하고 있다. 재보험사 사업모델 역시 보험사로부터 보험료를 받고 위험요소를 떠안는 것이다. 하지만 점차 투자자들은 ‘보험연계증권’으로 불리는 상품을 찾고 있다. 보험연계증권이란 재보험회사들이 지진, 홍수, 태풍 등 자연재해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만든 파생금융상품이다. 보험연계증권 투자자는 재보험사를 대신해 보험료를 수익금으로 가져간다. 대신 자연재해가 발생할 경우 보상책임을 져야 한다. 이 덕분에 전통적 재보험 상품의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스위스리’나 버뮤다 소재 ‘르네상스리’와 같은 재보험사가 대표적이다. 정보제공업체 ‘아르테미스’에 따르면 르네상스리가 중개, 관리하는 보험연계증권 규모는 약 20억달러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위험부담이 적으면서도 짭짤한 중개수수료 수입을 얻는다”며 “고객, 투자자와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사 브랜드도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보통 위험부담이 낮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자본 의무확충 비율이 낮아진다는 점도 매력포인트다.

베인앤드컴퍼니는 “그동안 전통적인 재보험 부문에서 성장잠재력은 매우 제한돼 있었다”며 “재보험 분야에서 거대한 빙산이 녹아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생명보험 부문에선 더 극단적 흐름까지 나타나고 있다. 일부 보험사들이 기존 사업모델과 상품을 폐기하고 있다. 주주와 고객에게 더 어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 동안 생명보험사들은 보험료를 받고 고객의 위험을 떠안았다. 연금상품은 고객들이 사망하기 전 무일푼이 될 위험을 막아준다. 투자보장상품은 고객이 시장변동성으로 피해를 볼 위험을 줄여준다. 이를 위해 보험사들은 수많은 보험계리사를 고용해 떠안을 위험에 적정한 보험료를 산정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최근 전 세계 보험사들이 ‘저자본’(capital-light) 사업모델로 이동하고 있다. 보험사들이 금융상품을 만들어 파는 것이다. 수수료를 챙기지만 투자에 따른 위험은 고객들에게 고스란히 남는 상품들이다.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선임부사장인 벤자민 세라는 “저금리와 규제강화 시대를 맞아 보험사들이 위험을 보장해주는 상품을 판매해 수익을 올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며 “보험사들이 새로 출시한 상품들은 보험상품이라기보다 자산관리상품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많은 보험사들이 위험을 덜 감수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보험업이라는 범주에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자본을 과도하게 쌓아둬야 하는 사업에는 손을 떼고 있다.

취리히 CEO 그레코는 “생명보험 부문에서 기존처럼 재무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자문서비스를 개발해 수수료를 얻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둔 악사는 올해 미국사업부를 설립했다. 시장 위험에 대한 노출을 줄이기 위해서다. 영국 프루덴셜 보험사는 핵심 주력상품 중 하나였던 연금상품을 판매중지했다.

가장 극단적 사례는 스탠더드라이프다. 1825년 영국 에딘버그에서 상호보험회사로서 출발한 생명보험사다. 2006년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사업모델을 바꾸기 시작했다.

지난 10여년 동안 스탠더드라이프는 전통적인 보험업에서 탈피해 수수료 수입과 자산관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저자본 투자 상품’을 취급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지난해엔 애버딘자산운용과 합병하면서 더욱 더 전통적인 펀딩매니저 외양을 띠게 됐다. 올해 전통의 보험사업 부문을 피닉스 그룹에 매각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합병과 함께 금융주로 증시에 재등장했지만, 자산관리 사업이라고 도전과제가 없을리 만무했다. 피치 선임디렉터인 윌렘 루츠는 “보험사들은 저축, 투자 부문에서 은행이나 자산운용사들과 정면충돌하고 있다”며 “이 시장 역시 매우 경쟁이 심한 곳”이라고 지적했다.

탠더드라이프가 뛰어든 자산운용 부문엔 블랙록이나 뱅가드와 같은 거대 공룡들이 지배하는 시장이다. 이들은 규모의 경제를 무기로 경쟁사를 고사시킬 정도로 가격을 낮추는 일이 다반사다.

베인앤드컴퍼니는 “보험사들의 최대 관건은 자산관리 활동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대마불사 금융사들과 겨루기엔 규모가 너무 적다. 많은 보험사들의 자산관리 활동은 단지 중개역할에 머무를 뿐”이라고 지적했다.

스탠더드라이프가 보험을 버리고 애버딘과 합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덩치를 키워 거대 경쟁사들과 어깨를 겨뤄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험사들의 변신 또는 외도에 대해 투자자들은 전적인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스탠더드라이프의 주가 1/3이 사라졌다. 반면 스탠더드라이프와 정반대로 기존 보험업무를 더욱 강화한 영국 보험사 ‘리걸앤제너럴’은 같은 기간 28%의 주가 상승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험업계 많은 회사들은 고객을 대신해 위험을 감수하는 기존 사업모델에서 탈피해 각종 유무료 서비스기업으로의 방향 전환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한다. 생명이나 재산, 상해보험 부문 가릴 것없이 모두 그렇다.

악사 자회사 카메트의 창립자 스테판 기네는 “보험업의 미래는 고객이 원하는 경험을 디자인하고 제공하는 데 달렸다”며 “위험을 떠안는 형태의 전통적 사업모델은 부수적인 부문으로 축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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