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간 5개 재벌그룹 찾아가 총수 만났지만 중소기업 방문은 2곳에 그쳐

재벌 경영진 만나 밥 먹으며 소원수리 … 서민 만나서는 '메시지 전달' 주력

"부총리 취임 이후 현장을 40회 방문하는 등 시장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해왔다. 주로 중소 벤처기업을 만났고 이번 주만 해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을 세 차례 만났다. 대기업은 4번 만났지만 투자나 고용계획에 대해 간섭한 적이 없다"

지난 3일 김동연 부총리가 낸 입장문이다. 삼성그룹 방문을 앞두고 '투자 구걸' 논란이 일자 이례적 형식으로 오후 늦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대기업도 만났지만 중소기업인과 자영업자와의 소통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는 취지다.

김동연 부총리 배웅하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사장단이 지난 6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간담회를 마치고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배웅하고 있다. 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정말 그럴까. 김 부총리의 9개월치 일정표를 들여다봤다. 오해를 살만 했다. 김 부총리는 처음 대기업을 방문한 작년 12월 이후 모두 5곳을 방문했다. 같은 기간 중소기업을 직접 방문한 것은 2건에 그쳤다. 중견기업연합회 등 중소벤처기업 단체와 간담회를 3차례 갖기는 했지만 회사를 직접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수출대기업 위주 성장정책을 벗어나, 중소벤처기업 육성과 내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던 '문재인정부 경제부총리'의 정체성이 애매해지는 대목이다.

◆"규모 가리지 않고 소통" 강조했지만 = 김 부총리가 대기업을 방문해 총수들을 직접 만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월부터다. 12월8일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장과 회동에서 "앞으로 기업 규모를 가리지 않고 만나겠다"고 처음 밝힌 것. 나흘 뒤 LG그룹 본사가 있는 여의도 트윈타워를 찾았다. 이 자리에는 당시 총수 역할을 하던 구본준 LG 부회장을 비롯해 하현회 LG 대표, 조성진 LG전자 부회장 등 경영진들이 총출동했다.

김 부총리는 곧이어 현대차그룹(1월17일) SK그룹(3월14일) 신세계그룹(6월8일) 삼성그룹(8월6일)을 방문했다. 부총리 방문에는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이재용 삼성 부회장 등 기업총수를 포함한 그룹 경영진들이 대거 참석했다.


◆만남의 질도 대기업 편향 = 같은 기간 김 부총리가 중소기업을 방문한 것은 2차례에 그쳤다. 김 부총리는 LG 방문 직후인 지난해 12월 19일 인천 연수구 자동차부품기업인 캠시스를 찾았다. 이 자리에는 캠시스 관계자뿐만 아니라 자동차 관련 중견·중소기업 대표자 10여명이 합석했다. 1월에는 인천 주안산업단지의 포장재 회사인 연우를 방문했다. 이 회사가 운영 중인 로봇을 활용한 스마트 공장 시스템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간담회에는 이 회사 경영진을 포함해 업계 관계자 10여명이 동석했다.

대기업 방문 형식은 '1대1'인 반면, 중소기업은 '업종 간담회'였던 셈이다. 이 자리에서 김 부총리는 관련 업종이나 방문 취지에 맞는 정책 메시지 전달에 주력했다. 중소기업 방문이 대기업에 비해 횟수도 작았고, '만남의 깊이'도 달랐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실제 김 부총리 대기업 방문일정은 대부분 상견례→현장 견학을 겸한 브리핑→오찬회동으로 이어졌다. 오찬 자리에서 김 부총리는 투자와 고용을 권유하고, 재벌회사들은 규제완화와 같은 '소원수리'가 오갔다. 일부 기업의 건의사항은 김 부총리가 즉석에서 관련 부처에 '검토'를 지시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가 불편해 한 속내는 = 김 부총리는 대기업과 만난 뒤 이들의 투자·고용 계획을 직접 또는 기재부가 취합해 발표하도록 했다. LG는 김 부총리를 만나 19조원 투자와 1만명 고용 계획을 공개했다. 현대차는 23조원에 4만5000명, SK는 80조원에 2만8000명, 신세계는 9조원 투자에 1만명 고용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청와대는 이 대목에서 김 부총리의 행보가 위태롭다고 판단했다는 후문이다. 기업의 팔목을 비틀어 투자·고용계획 발표를 강압했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대기업 방문 오찬에서 기업의 건의사항이 접수됐다는 점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떠올렸다는 말도 나온다. 최순실 사건의 발단도 정부(대통령)가 대기업에 문화계·창조경제정책 투자를 요청하고, 대기업의 민원을 들어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여권 일각에서는 김 부총리가 '향후 행보'를 의식해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김 부총리가 왜 기업의 투자계획을 기업이 발표하게 놔두지 않고, 직접 공개했겠느냐"고 의문을 표시했다. 이 관계자는 "일 욕심 때문인지, 정치 욕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적절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이같은 논란이 확산되자 김 부총리는 지난 6일 삼성 방문 때에는 투자·고용계획을 추후에 삼성측이 발표하도록 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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