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훈 지음 / 이상 / 1만4000원

#옛 서울역 석조 건물은 1922년에 착공되어 1925년에 완공되었는데 당시 일본의 동경역과 동아시아 최대 규모를 다툴 정도로 컸다. 1899년 우리나라에 처음 부설된 경인선은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운행되었으나 1900년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남대문역까지 노선이 연장된다. 이때 염천교 아래에 목조건물인 남대문 정거장이 세워졌고 이는 경성역(서울역)의 시초가 된다.

일제 수탈 역사의 현장이자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인 이 서울역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1919년 3.1 운동이 있던 해 9월 2일 신임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코 마코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1855~1920)의 동상이다. 강우규 의사의 동상은 의거 92주년인 2011년에 세워졌다. 비록 사이코 마코토 신임 총독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우리나라가 일본과의 병합을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세계 여론이 기만하던 일제의 간계를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다.

#3.1 운동 직후 사이코 일본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 의사는 일본 결찰의 취조를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독립연설'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아사히신문이 8일 공개한 조선총독부 관리들 증언록 속에 강 의사를 직접 취조했던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지바 료는 '당시 경찰은 명예를 걸고 사건을 수사했다'면서도 '그가 밉다는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역시 우국지사였다'고 증언했다. 증언에 따르면 사건 15일 뒤 연행돼 온 강 의사는 취조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를 두드리며 독립연설을 시작했다. 연설 중 숨이 찼던 강 의사는 '물을 줄 수 없느냐'고 해서 받아 마신 뒤, 다시 탁자를 두드리며 약 1시간 동안 연설을 계속했다. '공범자가 있는가'라는 지바 부장 질문에 강 의사는 '이처럼 큰일을 결행하는 데 누구와 상담할 수 있겠나'라며 반문했다고 한다. -'아사히신문' 기사를 '조선일보' 2000년 8월 9일자에서 재인용

안중근과 유관순, 김 구, 윤봉길. 역사에 기록되고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암울한 시대의 영웅들이다. 그러나 역사는 한 사람이 써내려간 영웅담이 아니다.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 스러져간 숨은 영웅들 또한 숱하게 많다. 다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세월의 풍파에 그 흔적이 사라질 뿐이다.

아버지를 부정해야 했던 시대

새로 나온 책 '이름 없는 역사'는 '잃어버린 시간에서 찾아낸 독립운동가 9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코 마코토를 향해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 임시정부에서 비서장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던 차리석 선생,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항일 투쟁을 하다 부상을 당하고 끝내 세상을 뜬 박차정 의사, 양평의 천석지기였으나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한 양건석·양승만 부자. 일제 치하에서 활동하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되찾은 이후에도 극심한 이념 대결, 청산되지 못한 친일세력, 6.25 전쟁, 숨 막혔던 군사독재 정권 등으로 인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임시정부의 비서장 차리석 선생은 1942년에서야 늦은 결혼을 했고 중국에서 아들을 낳았다. 애석하게도 그는 광복 이후 조국으로 돌아오기 전 생을 마감하고 그의 아내와 아들만 조국 땅을 밟는다.

마땅히 국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그들이었지만 시대는 혼탁했고 그들에게 여전히 엄혹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안두희의 흉탄에 스러졌다. 임시정부에서 함께했던 동지들은 암살의 공포를 피해 어디론가 다시 숨어야 했다. 아버지가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비서장을 했던 어린 차영조에게도 가혹한 현실이 다가왔다. 차영조의 어머니는 아들의 성을 바꾸기로 했다. 공포의 시대였다. 차영조는 원래 서인 차(車)씨에서 한 획이 빠진 신(申)씨로 바뀌어 학교를 다녔다. 평생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의 이름을 당당히 부를 수 없는 시대였다. 차영조는 19살 때까지 신영조로 살았다.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아버지를 부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시대였다."

임시정부가 환국하고 나서도 중국에 남은 동포들을 마저 귀환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광복군 양승만 상사는 1986년에서야 조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독립운동 공훈증을 받기 얼마 전 비운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중국에 살고 있던 양승만의 딸 양옥모 여사는 아버지의 나라가 그리워 예순이 넘은 나이에 귀화시험을 치르고 한국에 돌아왔으나 작은 단칸방에서 얼마 안 되는 보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봉사활동으로 하루 대부분을 보낸다.

"조선 청년들의 마음에 작은 파도라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전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안녕마저 포기한 그들의 위대하고 숭고한 삶은 제대로 보상 받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저자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의 얘기가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고 그들의 후손을 존경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보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존경과 애정으로 그들을 보살피는 일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투쟁으로 조선 청년들의 마음에 작은 파도라도 일어나길 바라오!"라고 했던 강우규 의사의 말씀이 공허한 외침이 돼선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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