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진 지음 / 보리 / 1만2000원

문재인 대통령도 종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20대 총선 공약에 박근혜정부의 '불가역적이고 최종적인' 협상을 뒤집고 재협상을 하겠다고 했지만 최근엔 조용하다. 문 대통령 역시 '재협상 등을 통해 피해자들이 인정하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의 합의를 도출하겠다'고 공약집을 통해 공언했다.

최근엔 '재협상'은 뒤로 미룬 채 사실상 합의 무효선언으로 종지부를 찍는 모양새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1억엔과 화해와 치유재단이 남아있다.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사과와 피해보상은 요원해 보인다.

이런 착잡한 마음은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의 그림 75장을 보면서 다소 풀리는 듯했다. 저자 김세진씨는 30대의 만화가 지망생이다. 김 씨가 소녀상과 맺은 인연은 2016년 1월에 시작했다. 그는 소녀상 지킴이로 12.28 한일합의 파기와 일본군 성 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사회참여에 나섰다. 그러고는 이듬해 5월 15일부터 104일동안 전국의 소녀상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능한대로 소녀상 옆에서 노숙을 해가면서 몸과 마음으로 채색했다. 밤새 소녀상 옆에서 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림마다 대화의 주제들이 가득가득 담겨있다.

경상도를 시작으로 전라도, 제주, 충청도를 넘어 한 여름에는 강원도 경기도를 두루 다녔고 서울에 들어온 것은 무더운 여름의 마지막 열기가 포효할 때쯤이었다. 한 장의 그림과 이에 곁들인 한 장 분량의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했다. 소녀상을 만나고 비를 피하고 땀을 훔치며 한땀 한땀 정성들여 그려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참견해준 이야기들은 현장감을 더해줬다.

위안부 피해자의 사연이 제각각이듯 소녀상도 남다른 사연들을 하나씩 안고 있었다. 저자는 핵심포인트를 짚어내 제목으로 삼고는 차분하면서도 날 것 같은 촌평을 내놓기도 했다.

'철거의 아픔을 간직한 소녀상'(부산 일본영사관 앞), '나주의 상징, 댕기머리를 한 소녀상'(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서산농부들이 지켜낸 소녀상'(서산시청 솔빛공원), '경포호 너머로 일본을 바라보는 소녀상'(강릉 3.1운동 기념공원), '뒷모습을 보여주는 소녀상'(부천 안중근공원), '작은 화단 속에 있는 소녀상'(동작구 흑석역) 등의 제목엔 소녀상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생계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발걸음 사이사이로 비쳐지는 동상이 삶의 일부로 녹아들어가는 모습이다.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목포근대역사관과 군산 동국사에 세운 소녀상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겨두는 고집은 현실참여를 강조하는 저자의 저항으로 읽혔다.

이 책의 맨 뒤엔 전국 곳곳에서 숨 쉬고 있는 111개 소녀상의 위치가 기록돼 있다. 이중 공공조형물로 지정된 것만 10개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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