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요코 지음 / 양지연 옮김 / 사계절 / 2만1000원

많은 이들에게 역사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 1904년 러일전쟁, 1910년 한일병합 등 앞서 일어난 사건의 순서를 외우는 일이다.

학창시절, 연도뿐 아니라 날짜까지 외우는 방식으로 역사를 공부하면서 역사에 흥미를 잃은 이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일본 도쿄대학의 가토 요코 교수는 역사에 대해 조금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역사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이미 정해진 과거에 '만약'을 가정하고 실제 결과와는 다른 선택지를 살핌으로써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게임의 규칙이 불공정하거나 심판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인이 국가와 맺은 사회계약이 깨졌다고 절망하지 말고, 게임의 규칙을 공정하게 바꾸거나 심판을 공평한 사람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 방법을 역사에서 배우는 일, 그 일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일본은 왜 진주만을 공습했나

전작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에서 청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의 근현대 50년을 탁월한 시각으로 분석해 "관념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역사를 구축했다"고 평가받은 그는 이번에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기까지 10년간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검토하고 결국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면밀하게 추적한다.

이 책은 저자가 일본의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집필됐다. 강의를 따라가다 보면,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는 일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3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 첫째가 만주사변-리튼조사단-일본의 국제연맹 탈퇴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중국 장제스 정권의 제소로 만주사변을 조사한 리튼조사단(국제연맹 조사단)은 만주에 관동군을 주둔시키는 것보다 만주를 자유로운 시장으로 개방하고 그 안에서 경제적 이익을 구하는 것이 일본과 세계에 안전하다는 논리로 일본을 설득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일본 내부에 '리튼 조사단은 중국의 이익을 우선한다'고 왜곡된 채 전달됐다.

일본에 주어진 2번째 기회는 삼국군사동맹과 관련된다. 삼국군사동맹은 2차 세계대전과 1937년 7월 극동에서 시작된 중일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해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체결한 조약이다. 일반적으로 나치 독일이 유럽의 전쟁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는 것을 저지하고 신속하게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 일본을 포섭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저자는 독일의 승리를 예상한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며 그 결정은 육군 등의 실무자들에 의해 입안됐음을 밝힌다.

3번째 기회는 1941년 12월 8일 새벽에 기습적으로 시작된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관해서다. 진주만 공습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중에는 미국 국내의 반전 여론을 꺾기 위해 미군이 일본군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설명도 존재한다.

저자는 일본군 제로센 전투기가 진주만을 덮치기 전까지 9개월 동안 진행된 미일교섭 과정을 차근차근 짚는다.

1941년 3월 교섭이 시작된 이래 미국과 일본은 수차례 대사를 파견하고 회담을 열면서 전쟁으로 치닫던 상황을 돌리려고 했다.

저자는 놀랍게도 미일교섭 당시 양국 정상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나는 것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교섭이 진행되던 그해 7월 일본군은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을 기습 점령했고 미국은 일본에 대한 수출을 전면 금지한다. 그 와중에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미국과 일본 각각의 내분은 심화된다. 마지막까지 평화의 끈을 놓지 않았던 루스벨트는 12월 6일 오후 9시에 쇼와 천황에게 타협을 제안하는 전보를 보냈지만 불과 30분 뒤 워싱턴에는 일본의 선전포고가 도착한다.

'선택의 지혜'가 필요하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새로 만들어진 헌법의 세계에서 전후 70년을 보내며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2015년 8월 15일 아키히토 천황은 전국전몰자추모식에서 "과거의 전쟁을 깊이 반성함과 동시에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후인 9월 19일, 일본 참의원은 안보법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일본 자위대는 '자위'의 개념을 넘어 해외에서 군사활동을 벌일 수 있는 군대로 성격이 바뀌었다. 아베 내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다'라고 적힌 이른바 '평화헌법'에 자위대를 넣기 위한 작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일본이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던 3번의 기회를 밝히며 지난 세기의 오판을 벌써 잊었느냐고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이 책에서 옮긴이는 '옮긴이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보법제가 국회를 통과한 뒤로 아베 정권은 헌법 개정안을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언젠가 국민투표의 형식으로든 다른 형태로든 국가는 국민에게 국가가 직면한 문제를 물을 것이고 국민은 어떤 형태로든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과거 세 가지 교섭의 과정을 되짚으며 가토 요코는 선택을 할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선택의 제약 조건은 무엇인지, 선택 문항은 어떤 식으로 제시되는지 등을 보여준다. (중략) 그러니 한편으로 이 책은 선택하는 순간의 문법을 보여주는 문법책이자, 선택의 지혜를 기르기 위한 하나의 가이드북인 셈이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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