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 지음 / 책과함께 / 2만8000원

우리에게 유럽은 상당히 먼 곳이다. 지리적으로도 최소 10여시간의 비행시간이 필요한 지역이고, 경제적으로도 미국이나 중국, 일본 등에 비해 우리생활과 밀접한 곳이 아니다. 28개의 국가가 하나로 묶이는 유럽연합의 경험도, 30대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정치현실도 조금은 생경한 풍경들이다.

그것은 파리 로마로의 낭만적 여행을 꿈꾸거나 고흐와 가우디의 작품을 열망하는 예술지망생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로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굳이 꿈꾸거나 열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홍식 숭실대 교수의 '문명의 그물'은 이런 통념을 단번에 뒤집는다. 몇 천년 유럽이 일궈낸 문명이 바로 지금 우리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우리의 삶을 틀 짓는 상당수의 제도와 개념이 유럽문명의 산물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미술이나 음악, 종교도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유럽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우리 고유의 문화나 중국 인도 등 유럽이 아닌 지역에 근원을 둔 부분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현대에 와서는 유럽문명과 뒤섞여버렸다.

또 다른 독자적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의 사례를 보면 그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상부구조를 구성하는 사회주의 정치체제도, 하부구조의 시장경제도 모두 유럽산이다. 오늘 중국을 있게 한 중국혁명도 사실 유럽이 원산지다. 중국인들 중에는 맹자의 역성혁명 등을 예로 들며 고유성을 주장할지 모르나 농민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처럼 유럽문명의 그림자를 지운 순수 중국문명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문명의 그물'에서 저자는 언어 종교 미술 음악 전쟁 평등 등 12개의 대표 키워드를 선정해 유럽문명의 전체 모습을 그려나간다.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은 '그물'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모든 문명이 각각의 언어처럼 나름의 구조와 규칙이 존재한다고 보아 '문법'이라는 개념을 썼지만, 조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문명은 똑 부러지는 법칙이나 건축물처럼 딱딱한 구조물이 아니라 그물처럼 느슨하고 유연한 연결이라는 것이다. 그물은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으며 명확한 경계도 없다. 하지만 그물은 개별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는 유럽 내 각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인간과 사물을 엮으며 다양한 그물이 뒤엉키는 모습으로 오늘의 유럽문명을 형성해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하나 덧붙인다면 경쟁과 모방은 그물코처럼 얽힌 유럽문명을 살찌우는 토대가 됐다.

저자는 '문명의 그물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 유럽의 역사는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의 유럽 통합도 민주주의라는 동일한 구조 아래 다양한 정치제도를 수용하는 운동'이라고 강조한다.

70년 분단체제 종식과 한반도평화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유럽문명은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협력이 사라지고 경쟁과 약육강식의 원칙만 남았을 때 유럽문명은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재앙을 만들었지만, 그것에 대한 반성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평화적 통합을 진행하고 있는 유럽의 오늘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바로 그것이 지금 '문명의 그물'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남봉우 기자 bawoo@naeil.com

남봉우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