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섭 성균관대 글로벌연금대학원 겸임교수

연금제도는 노후빈곤 예방과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최고 발명품이다. 연금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귀한 가치가 있다. 또한 연금제도는 ‘국민의 삶’과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하지만 하나의 연금제도로 위의 두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역사적 평가다. 다층연금체계 속에서 각각의 연금제도가 제 역할을 다할 때에만 국민 삶과 국가경제를 모두 살릴 수 있다. 우리나라는 외형상 복지선진국 못지않은 다층연금제도를 갖추고 있다. 기초연금,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노인빈곤율, 노인자살율, 공적연금에 대한 깊은 불신은 각각의 제도가 외형과 달리 기능마비 상태임을 웅변해 준다. 국민연금제도에 과하게 집중된 기능을 타 연금제도에 이관하고 각각의 역할을 재정립, 강화하여 적실성 있는 다층연금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국민연금 노후빈곤 예방과 노후소득 보장에 큰 도움 주지 못해

현 국민연금은 모든 근로자, 사업가, 자영업자, 무직자를 한 제도에 포괄하고 있다. 취약계층의 노후빈곤예방은 물론 차상위 계층 이상의 노후소득보장을 모두 한 제도 안에서 실현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대 간 형평과 재정안정화까지 이뤄야 한다. 이것이 과연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일인가? 1998년 국민연금 개혁 당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도시 자영업자들을 국민연금에 의무 가입시켰다. 사회적 연대라는 소중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민연금은 그들의 노후빈곤 예방과 노후소득 보장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미가입자들을 양산하여 소득불평등만 키우고 있다. 보험료 인상마저 어렵게 하여 중산층 이상의 적정연금 확보와 연금재정 안정화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보험료 9%를 20년 이상 올리지 못하는 말 못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험료를 올리면 취약계층의 가입률은 더 떨어져 제도의 정당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의 진원지가 여기다.

이렇게 국민연금문제의 기저에는 광범위한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 등 쉽게 개선되기 어려운 산업구조가 있다. 그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전 국민을 한 제도에 묶은 것이 화근이다. 거기에 국민연금 하나로 ‘사회적 연대연금’을 만들려는 야심이 더해졌다. 하지만, 모든 부류의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빈곤예방, 노후소득보장, 세대간 형평, 재정안정화, 경제성장 견인 기능을 다 이뤄보겠다는 높은 이상은 실패한 것 같다.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시급히 연금 제도 간 수행기능을 재조정하고 각각의 임무를 명확히 해야 한다. 국민연금의 과중한 짐 일부를 다른 연금제도에 옮겨 각각 활기차게 움직이게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빈곤예방은 기초연금이, 고소득자들의 추가 노후소득보장은 개인연금이 담당하는 것이다. 차상위 계층 이상의 대다수 국민들은 비례성이 강한 국민연금에서 적절한 노후소득을 확보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소득상한선과 보험료 제한 등 이중 삼중의 제약을 풀어 중산층의 연금확보 기회를 넓혀주어야 한다. 그런 조치가 없다면 공무원연금 등 특수직역연금과 국민연금의 급여 형평성,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 이를 무시하고 현 제도를 고수할 수 있을 것인가?

‘평등’과 ‘효율’이라는 진보와 보수의 가치를 잘 조화시켜야

각각의 연금제도를 따로 논의해서는 얽힌 문제에 대한 진단도 대안마련도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다층연금체계를 재정립하는 구조개혁과 세부내용을 다듬는 개혁을 함께 논의해야 할 때다. 연금선택 비중이 2%에도 못 미쳐 기능 상실한 퇴직연금, 기대에 못 미치는 불안한 개인연금, 어정쩡한 기초연금의 역할 제고 방안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연금개혁이 어느 한 정권의 책임이나 업적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백년대계 틀을 만들고 국민들의 삶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작동하는 다층연금체계를 갖춰야 ‘평등’과 ‘효율’이라는 진보와 보수의 가치들을 잘 조화시킬 수 있다. 세계은행과 국제노동기구가 오랜 갈등 끝에 내린 소중한 합의이다. 반복되는 연금개혁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들의 삶의 안정과 시장의 활력을 담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재섭 성균관대 글로벌연금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