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규 중앙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인류의 조상이 이 땅에서 살기 시작한 700만년 역사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지구의 주인이 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르네상스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이 확고해지면서 비로소 우주 중심이 되었고, 인간의 존엄성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르네상스 인본주의가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기는 했지만, 인간끼리의 문제는 풀지 못했다. ‘인간중심 사고’는 1차, 2차, 3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3차에 걸친 산업혁명은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 내적 존엄성을 담보로 잡혀야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지구 환경 파괴와 인간간 갈등은 심화됐다. 결국 인류는 봉건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경험하면서도 지배와 피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4차산업혁명의 초입에 도달했다.

인본주의와 융합해야 4차산업혁명 완수

인간은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지구상 유일의 존재다. 4차산업혁명의 핵심인 인공지능이 인간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의 근간에는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이라는 자부심이 존재한다. 다행히 20세기 중반부터 인간 중심적인 ‘휴머니즘’이 자연을 훼손하고, 인류를 더 일찍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성찰을 해왔다. 이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增强人本主義),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 脫人本主義)과 같은 사상으로 이어졌다. 이 두 개념은 표면적으로는 상호 반대되는 개념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확고해진 휴머니즘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다.

혹자들은 아직 실체가 없는 4차산업혁명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며 비판한다. 그러나 인문학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일찍 쟁점화 된 게 다행스런 일이다. 4차산업혁명의 특징을 ‘초연결, 초지능, 초실감, 초융합’으로 분류한다. 향후 4차산업혁명이 완수되면 각 개인은 내적, 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이전보다 더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그렇다’와 ‘아니다’라는 두 주장 모두에 개연성이 존재한다. ‘그렇다’라는 대답에서도 반드시 ‘필요조건’이 뒤따른다. 인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각 개인이 자연과의 공존 상태에서 자유를 느끼고, 자신과 외부 개체들 사이에서 건강한 힘의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등에 도달하는 것이 그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4차산업혁명이 이러한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인간 사회 내부에서 지배와 종속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기능을 폐기하고 동물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결국 기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지구의 중심이 ‘자연-동물-신-인간-기계’로 이어지는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인문학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오히려 인문학이 4차산업혁명을 이끌고 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인문학 분야의 역량을 키우는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인문학은 과거의 사실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주기능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제 그 기능과 더불어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 인공지능자동차(일명 자율주행자동차)로 인해 주관적으로 감각기관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 인간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 진단해야 한다.

미래 인간과 사회에 필요한 담론을 제공

현재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에서 인문역량강화(HK : Humanities Korea)사업을 통해 대비를 하고 있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HK연구소가 세계적인 인문학 연구소로 육성되어야 이유는 분명하다. 미래 인간과 사회에 필요한 담론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나라가 4차산업혁명 시대에 가장 건강한 유토피아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인문역량사업이 4차산업혁명을 이끌어 가는 기폭제가 되기 위해서는 전폭적인 지원과 체계적인 관리가 뒤따라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과 사회가 무엇을 대비하고, 산업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가야 하는지, 기술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인문학적 좌표가 절실히 필요할 때이다.

이찬규 중앙대 교수 국어국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