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등 8곳에서 시위 … 당시 학적부 등 원문자료 없어 상당수 서훈에서 제외

내년이면 학생독립운동 90주년이다. 이 운동은 광주에서 촉발된 1929년 11월부터 전국으로 번진 1930년 3월까지 일어난 항일운동을 통칭한다. 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린다.
내일신문은 학생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면서도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기록한다. <편집자 주>

나주시는 해마다 10월 30일 옛 나주역에서 학생독립운동기념식을 열고 있다. 옛 나주역 바로 옆에는 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은 1929년 당시(왼쪽)와 현재(오른쪽) 나주역 모습이다. 사진 광주일고 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나주역 사건'으로 촉발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가장 먼저 전남으로 퍼져나갔다. 일제는 독립운동 확산을 막으려고 보도통제에 나섰다. 하지만 한번 불타오른 광주의 시위소식은 인편을 통해 전남 곳곳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인편으로 전달된 항쟁 소식 = 전남에선 목포학생들이 가장 먼저 독립운동 깃발을 올렸다.

당시 목포는 1897년 개항 이래 영산강 수로교통 요지였고, 대일미곡 수출거점이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전남도 인구는 한국인 40만5828호 208만57명, 일본인 8543호 2만1707명이었다. 이 가운데 일본인(7931명)이 가장 많이 산 곳이 바로 목포다. 그만큼 경제적 수탈이 심했던 터라 반일감정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특히 부두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일찍부터 활발했다. 목포에서 가장 먼저 시위가 일어났던 곳이 목포상업학교(현재 목상고등학교)다. 이 학교는 당시 한국인 학생 121명과 일본인 학생 130명이 공학제로 운영돼 민족차별이 어느 학교보다 심했다. 특히 목포상고 학생들은 학생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광주지역 독서회와 긴밀하게 교류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광주 소식이 전해지자 최창호, 강영수, 권영욱, 이인형, 이광우, 정찬규, 오상록, 박종식 등이 11월 7일 모임을 갖고 대책마련에 나섰다. 이들은 19일 아침 시위를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사전 모임을 가졌다. 마침내 19일 해가 떠오르자 임성춘, 이광우, 이인형 등이 광주 소식을 전하고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삽시간에 불어난 학생들은 정명여학교(현재 정명여고) 앞에서 '연행학생 즉시 석방'과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등을 외치며, 목포역까지 진출했다. 한번 시작된 학생 시위는 22일까지 진행했다. 이 사건으로 이인형, 박사배 등 15명이 최고 징역 1년을 받았다.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공적조서 대조 결과, 이들 중 이인형, 정찬규, 오상록, 박종식, 박상준, 양재욱, 조창섭 박사배 등이 서훈을 받았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여전히 미서훈자로 남아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6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해 학생독립운동 정신 계승을 강조했다. 나주 방국진 기자

◆나주역에서 다시 타오른 시위 = 목포에 이어 나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나주는 광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광주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김성민 지음)'에 따르면 당시 통학생은 광주고보(현재 광주일고) 70명 등 170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나주 통학생이다. 나주는 특히 드넓은 평야가 있어서 일본인(3513명)이 목포와 광주 다음으로 많았다. 나주 시위는 학생과 나주지역 사회 및 청년단체 참여로 진행됐다.

특히 박준채 선생을 통해서 광주 시위를 상세히 전해 들었다. 시위는 17일 나주 장날로 잡았다. 하지만 농번기를 맞아 학교가 임시 휴교하는 바람에 27일 장날로 연기됐다. 이 때문에 목포보다 뒤늦게 시위를 하게 됐다. 이 때 참여했던 인물이 유찬옥 박준삼 박공근 서형민 박동희 박영민 박진순 양영택 홍민후 이창신 이성환 원복준 이채후 등이다. 이 시위로 박공근과 유찬옥 등 5명이 실형을 받았다, 이들이 재판을 받는 동안 나주보통학교 학생 200여명이 이듬해 2월 10일 2차 시위를 벌였고 50명이 검거됐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따르면 나주에선 20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반면에 이창신 홍민후 이채후 이성환 원복준 박준삼 서형민 박영민 등이 미서훈자로 남아있다.

◆동쪽 끝 여수까지 번져 = 목포와 나주로 번진 학생독립운동은 이듬해 2월까지 여수 순천 보성 옥과 강진 함평 창평 등 전남 곳곳으로 번져갔다. 이곳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청년운동가까지 참여했다. 여수에선 1930년 1월 23일 여수보통학교 학생들이 격문을 살포했다. 또 3일 후에 여수수산학교 이용기 등 7명이 학생시위로 검거됐다. 일본 경찰은 증거가 충분하지 않는데도 학생들을 석방하지 않았고, 학교는 이를 빌미로 12명을 퇴학하고, 9명을 정학시켰다. 함평보통학교(현재 함평초교) 학생들도 1929년 12월 12일 장날을 기점으로 시위를 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돼 4명이 구속됐고, 이에 항의하는 동명휴업에 들어갔다.

◆추가 서훈 기대 높아져 = 국가보훈처가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서훈 기준을 '3개월 이상 옥고'에서 '퇴학'까지로 완화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추가 서훈에 대한 기대가 한층 높아졌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입증할 자료가 여전히 부족하다. 함평초교에는 1929년 이후 제적부가 아직 남아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 나온 인물을 제적부와 비교했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을 찾는데 실패했다. 학생독립운동이 활발했던 목포상고와 창평초교 등은 당시 기록이 모두 유실됐다. 나주 역시 독립운동유공자가 20명에 불과할 정도다. 나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이창신씨 역시 미서훈자로 남아있다. 취재 중에 이창신씨가 나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해 재판을 받았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이명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장이 바로 그의 후손이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추가 서훈에 대비해 당시 참여했던 인물 에 대한 후손들의 제보 등을 받고 있다. 이창신씨 후손인 이철영씨는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러 가지 기록이 있지만 여전히 미서훈자로 남아있다"며 "조만간 국가보훈처에 추가 서훈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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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국진 기자 kjbang@naeil.com,홍범택 기자 durumi@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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