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제·의원내각제 등 다양한 권력구조 두루 경험

좌우 연립정부 수립에 따른 국정운영 체계 전면 조정

개헌 심의 과정 거치면서 독립 후 제헌헌법 기초 마련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임시헌법을 만들고 모두 5번 바꿨다.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첫 회의가 밤을 넘겼다. 경성뿐만 아니라 상해에서도 논의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안이 상정됐다. 조소앙에 의해 기초된 임시헌법안은 기초회의를 거쳐 전체회의를 지나면서 수정됐다. 교육 납세 의무에 병역 의무를 더했다.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대목에서 가장 큰 격론이 일었지만 결국 통과됐다. 국가 체제와 정치 형태, 기본권 등이 장 구분없이 10개조로 만들어졌다. 제 1조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한다'고 했다.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운영을 임시의정원이 주도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신년기념식 |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구성원들이 1921년 1월1일 신년축하식 기념 사진을 찍었다. 자료 국가보훈처


◆장관-의원 겸직 사라졌다 다시 회복 = 첫 개헌은 6회 임시의정원에서 시도됐다. 1919년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한달동안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렸다. 의원은 28명이 참석했다.

개헌안은 8월 28일에 제안됐다. 서기가 의안 전문을 낭독했고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가 임시헌법 개정에 관한 제안 설명을 했다. 안창호는 정부 통합을 위해 한성정부의 대통령 활동을 하고 있는 이승만을 인정하기 위해 상해에서 수립한 정부를 희생하고 한성정부를 승인하자고 제안했다. 김태연 의원의 동의와 서재철 의원의 재청으로 접수, 부의됐다. 8월30일에 법제위원장의 수정보고가 있은 후에 정부가 제안한 개정안과 법제위원회 수정안을 대조해가며 2차 독회에 들어갔다.

삼권분립에 따른 권력의 책임과 행사, 구황실 우대, 안창호의 노동국 총판 명칭 등이 논란이 됐다.

9월 4일부터 시작한 3차 독회에서 제7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조항을 추가하기로 했다. 9월 5일 오후 2시30분부터 2장을 논의했다. 제4장 의정원의원과 국무원의 겸직금지 조항에 대해 여운형의 동의가 있었다. 최근우와 안창호가 반발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9조엔 의원 연령을 25세에서 23세로 낮추자는 여운형의 동의와 조완구 의원의 재청으로 가결됐다. "23~25세 청년이 25세 이상의 국민보다 공적이 많고 신교육을 받은 사람도 많다"는 게 이유였다.

임시헌법개정안은 9월 6일에 통과됐다. 정족속 미달로 10분간 휴회, 병석에 있던 손정도 의장까지 참석해야 했다. 김홍서 의원의 동의와 김병조 의원의 재청으로 오후 3시에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5조에 '대한민국의 입법권은 임시의정원이, 행정권은 국무원이, 사법권은 법원이 행사한다'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밝혔다. 헌법 편제를 임시대통령-임시의정원-국무원-법원의 순서로 배열해 임시대통령을 임시의정원과 법원의 상위에 있는 지위로 구상했다. 9월 8일 임시의정원에 재의요구. 9월 11일 전문을 낭독한 후 최근우 의원이 동의, 심홍서 의원 재청으로 접수, 토론에 부치기로 가결했다. 겸직반대는 '가 8표, 부 5표'로 정부 재청을 수용. '본원 의원이 관리로 임명되는 시는 의원의 자격이 소멸됨'이라는 규정을 삭제해 임시의정원 의원의 정부 직원 겸직을 가능하게 한 것이 주목된다.


◆이승만 탄핵이 만들어낸 개헌 = 대통령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꾼 2차 개헌은 이승만 대통령 탄핵 이후인 1925년 3월30일 밤 10시에 전원합의로 통과됐다. 공포식은 4월7일에 있었다. 임시대통령의 임기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하고 정치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으로 헌법 개정을 선택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조직한 국무회의의 결정으로 행정과 사법을 통할하도록 규정했다.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해 정부의 내부분열을 막으려 한 것이다. 3년 임기의 국무령은 임시의정원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임시의정원이 국무령과 국무원을 선임할 수 있었다. 헌법 편제에서 '임시의정원'을 '임시정부' 뒤에 뒀다. 임시 정부의 국회 해산권은 없었다. 헌법 적용범위를 독립운동자로 한정했다.

◆김구가 제안한 '주석제' = 국무령 취임 고사와 조각의 어려움으로 2년만에 다시 개헌을 시도하게 됐다.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취임과 동시에 개헌작업에 착수했다. '정당을 통해 국정을 운영한다'는 '이당치국'을 위한 개헌이었다. 중국 국민당을 벤치마킹한 체제다. 당시 유일당운동과 연결돼 있다. 제3차 개헌이 이뤄진 제18회 임시의정원은 1926년 11월 20일에 개원했다. 윤기섭 등 14명이 헌법개정제의안을 발의했다. 12월23일에 통과, 2017년 3월5일에 공포됐다.

임시의정원의 순서가 제 2장으로 편제됐다. 정부수반인 국무령을 없애고 5~11명의 국무위원으로 조직한 국무회의 의결로 국정을 운영했다. 국무회의 주석은 국무위원들이 교대해 맡는 회의 주관자일 뿐이었다.

2조에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될 때에는 국가의 최고권력이 이 당에 있다'고 했다. '본 약헌은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된 때는 이 당에서 개정함'이라고도 했다.

1927년 3월 5일에 공포한 대한민국임시약헌은 중경에서 1940년 개헌이 이뤄지기까지 14년간 존속했다.

◆주석에 국군통솔권을 = 4차 개헌작업은 1940년 10월1일부터 시작했다. 제32회 정기회였다. 일주일만인 10월8일에 통과됐다. 김구의 지도력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작업이었다. 국가의 최고권력이 당이 있다는 규정이 삭제됐다. 국무위원회 주석의 권한을 크게 강화했다. 국무회의가 국무위원회로 바뀌었다. 국무위원 호선제도를 바꿔 주석을 임시의정원에서 선거하도록 했다. 주석은 국군을 통솔하고 필요할 때는 행정각부의 명령을 정지시킬 수 있었다. 국무회의의 의결로 긴급명령을 발하고 정치범 특사, 대외적으로 임시정부 대표 등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임시의정원 장이 임시정부보다 앞서고 주석을 임시의정원에서 선거한다고 했지만 주석의 강화된 권한만큼 임시의정원의 지위는 약화된 면이 있다.

◆제헌헌법의 기초가 된 5차 개헌 헌법 = 1944년 4월20일 제36회 임시의정원회의가 열렸고 37명 중 35명 찬성으로 4월 21일에 통과됐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해 광복후 민족국가 건설에 대비하기 위한 내용을 추가하기 위해 이뤄졌다. 임시의정원 임기를 3년으로 정했다.

임시정부는 국무위원회 주석과 국무위원으로 조직한 국무위원회로 국무를 총괄케 했다. 국무위원은 8~14명 이내로 규정했다. 행정부를 국무위원회와 행정연락회의의 이중 구조로 개편했다. 임시의정원에서 선출하는 국무위원회와 행정 각 부서 사무의 연락과 통제를 위해 주석이 주재하는 연석회의를 열도록 한 것이다. 국무위원회는 독립운동의 원로들과 각 정당의 대표자들로 안배 구성되는 데 비해 행정연락회의는 현실적인 정책집행능력본위와 김구직계의 인물들로 구성하려는 데 있었다.

심판원을 별도 장에 삽입해 사법권을 보장한 것은 6차 임시헌장의 특징이다. 광복을 대비한 헌법전 정비라고 이해할 만 하다.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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