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진관사 거점으로 활약한 백초월 스님

일본군부터 중국·광복·국군 복무한 이종열 지사

"태극기 훼손됐어요. 왜 이런 걸 게양해요?"

서울 은평구 공무원들은 매년 3.1절과 광복절이면 비슷한 항의전화를 받곤 했다. 누렇게 색이 바랜데다 한쪽 귀퉁이가 헤진 태극기가 며칠씩 거리에 나부끼기 때문이다. 지난 2009년 진관동 진관사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다. 백초월 스님이 진관사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품이다.

은평구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이웃 자치구인 마포구 서대문구와 함께 ??3.1독립운동, 그날의 함성??을 진행했다. 김미경 구청장을 비롯한 참여자들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은평구 제공


◆일본군 군용 열차에 '대한독립만세' = 백초월 스님은 만해 한용운과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백용성 스님과 함께 불교계 독립운동가 3인으로 꼽히지만 다른 두명과 달리 이름이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 영원사에서 출가한 그는 3.1 독립선언 직후 상경한 이후 불교계 독립운동을 조직화한 인물이다. 김시업 은평역사한옥박물관 관장은 "민족시인 만해에 가려져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매우 혁명적인 행동주의자였다"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스님 가운데 유일하게 옥중 순국했다"고 말했다.

백초월 스님은 상경한 뒤 진관사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큰스님 반열에 오른 지식인이었던 그는 진관사와 마포에 있던 포교당 극락암에 은거하면서 청년·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를 거쳐간 청년들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를 비롯해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전국 사찰을 돌며 독립운동자금과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에 전달했고 비밀 소식지인 혁신공보를 발행했다.

1919년 11월 상하이에서 발표된 승려독립선언서 즉 대한승려연합성명서를 주도한 이도 백초월 스님이다. 12개 절 주지와 승려 7000여명이 우리말과 중문 영어 3개 국어로 "일본 통치를 배척하고 민족 독립을 국내외 동포와 세계에 천명"했다.

1000년 고찰 진관사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 진관사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백초월 스님이 일제 감시를 피해 숨긴 것으로 추정된다.(태극기 내 사진은 백초월 스님) 사진 은평구 제공


백초월 스님 활약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품이 진관사 태극기다.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불단과 기둥사이에서 단재 신채호가 창간한 신대한, 임시정부 기관지 성격을 띠는 독립신문 등 20점과 함께 빛바랜 태극기가 발견됐다. 가로 89㎝ 새로 70㎝ 태극직경 32㎝로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과 같은 형태다. 이듬해 등록문화제 458호로 지정된 진관사 태극기는 2015년부터 은평구 통일로 연서로 증산로 등 주요 거리에 내걸렸고 올해는 은평구 전역은 물론 이웃 지자체인 마포구와 서대문구에도 나부꼈다.

진관사 태극기는 일장기를 활용해 제작돼 더 눈길을 끈다. 태극무늬와 건곤감리를 덧그려 태극기를 만든 것이다. 김시업 관장은 "백초월 스님은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일본군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글씨를 썼다고 한다"며 "그 기차가 신의주를 지나 만주까지 갔다고 생각해보면 참으로 통쾌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 관장은 "승려연합선언서가 11월에 발표된 점만 봐도 3.1운동은 서너달에 걸친 만세운동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며 "안타깝게도 선언서는 국내에는 없고 일본 황실과 프랑스에는 보관본이 있다"고 덧붙였다.

백초월 스님은 만주로 보내는 독립운동 자금에 연루돼 체포됐고 1944년 6월 29일 청북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했다. 같은 날 만해 한용운도 작고, 불교계 독립운동을 이끌던 두 별이 함께 스러졌다.

은평구는 매년 3.1절과 광복절에 태극기와 함께 진관사 태극기를 지역 내 주요 거리에 내걸고 있다. 사진 은평구 제공

◆"3.1운동 역사적 성격은 혁명" = 백초월 스님과 함께 은평구를 대표하는 또다른 독립운동가는 이종열(95·신사동) 애국지사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군부터 중국군 광복군 국군까지 거친 이력으로도 눈길을 끈다.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 독립군을 토벌하는 부대에 배치됐지만 동료 7명과 함께 탈출을 감행, 중국군에 인계돼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정보공작 활동을 했다. 이후 임시정부와 연락이 닿아 광북군에 입대했고 국내 침투 준비를 했는데 거사일 보름을 앞두고 일왕이 항복 선언을 했다. 광복 이후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 지사는 국군으로 참전, 제주도 모슬포 경비중대와 경기도 동두천 미군부대를 거쳐 제대했다.

은평구는 진관동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백초월 스님과 이종열 지사 활동과 3.1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유물,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을 기리는 공간도 있다. 은평에 적을 둔 독립유공자와 후손을 소개하는 특별코너에서는 동영상을 통해 남겨진 가족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 3월 1일 전후에 발표된 다양한 독립선언서를 통해 3.1운동의 흐름과 혁명적 성격을 되짚는다는 의미가 있다. 김시업 관장은 "3.1운동은 만세운동이기도 하지만 전 민족 전 민중이 자각해 중세에서 근세로 나아간 혁명이었다"며 "국민들이 자각해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민족 독립운동이자 근대 혁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중국은 물론 인도차이나와 아랍까지 영향을 미쳤다"며 "3.1운동은 어떤 점에서는 200%, 1000% 성공한 운동이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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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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