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의회, 구매제한·스티커부착 조례

정부·지자체·학교 등 공공기관 무분별 사용

정부 "신중해야" … 보수정당 "천박한 발상"

서울시의회와 경기도의회가 올해 들어 일본 전범기업 제품사용에 제동을 거는 조례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교육청은 외교관계 등을 고려해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보수정당이 '반일 감정을 선동한다'는 논평을 내는 등 정치권이 가세하며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21일 서울시의회에 따르면 홍성룡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월 '서울시 일본 전범기업과의 수의계약 체결 제한에 관한 조례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조례안은 서울시와 시의회, 시 산하기관이 전범기업과 수의계약을 체결하지 않도록 서울시장이 노력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시장이 25개 자치구에도 전범기업과 계약체결을 제한하도록 권장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서울시교육청에 대해서도 같은 내용의 조례 안이 발의됐다. 그러나 두 조례안 모두 해당 상임위에서 심사를 보류해 놓은 상태다. 서울시의회 관계자는 "집행부는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까 우려를 많이 했고 숙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심사가 보류됐다"면서 "조례 취지에는 많은 의원들이 공감했다"고 말했다.

경기도의회에서는 '경기도교육청 일본 전범기업 제품 표시 조례안'이 발의됐다. 황대호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조례안은 학교에서 사용하는 빔프로젝터 카메라 복사기 등 일부물품 중 일본 전범기업의 제품에 인식표를 부착하고, 교내 전범기업 제품 실태조사 등을 교육감 책무로 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두 조례안에서 정의한 전범기업은 2012년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발표한 일본 기업 299개를 뜻한다. 여기엔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가와사키 등 일본 대기업 상당수가 포함된다.

하지만 정부와 교육청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1일 국회에서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이 이들 조례안에 대한 입장을 묻자 "정부차원에서 지자체 활동에 구체적인 평가나 언급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관련조례안에 대해선 다양한 외교관계를 감안, 의회 심의과정에서 신중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경기도교육청도 해당조례안에 대해 수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서를 도의회에 제출했다. 이재정 교육감은 이와 관련 "외교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정부측에서 먼저 입장을 정해야 한다"면서도 "조례보다 국민과 학생들 속에서 이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표출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시의회와 경기도의회가 이 같은 조례안을 발의한 배경은 그동안 정부와 지자체, 학교 등 공공기관에서 일본 전범기업 제품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해온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지난 3년간 문구류를 포함해 최소 500억원 이상의 일본제품을 구매했다. 경기도내 각급 공립학교 3200여곳의 물품보유현황 조사결과, 빔프로젝터와 카메라는 일본제품(전범기업 포함)을 50% 가량 사용하고 있고, 캠코더는 일본제품이 7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 조정식 민주당 의원이 낸 자료를 보면 2014년 1월부터 2018년 8월까지 일본 전범기업 6곳은 조달청을 통해 정부 각 부처와 국가계약을 맺고 1510억4871만원의 제품을 납품했다.

그러나 일본 전범기업 제품 구매를 제한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세계무역기구 정부조달협정으로 조달시장에서 이들 제품을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자체가 구입한 방송장비 의료기기 등 특정분야제품은 대체할 국산품이 없는 실정이다. 서울시의회와 경기도의회에서 발의된 조례안들은 이런 현실을 감안해 무분별한 일본 전범기업 제품 사용을 자제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보수정당 등은 이런 실정은 무시한 채 노골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바른미래당은 20일 경기도의회 조례안에 대해 "아이들 교육도 한일관계도 망치는 천박한 발상"이라며 "하다하다 안되니 애국심 팔이까지 하기로 한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일부 보수언론은 '반일감정 선동 자제하라'거나 '일본제품엔 전범 교가엔 친일 딱지'냐며 친일작곡 교가 및 지자체 대표노래 교체 등 친일청산운동 자체를 '시대착오'라고 몰아가고 있다.

홍성룡 서울시의원은 "세계무역기구 정부조달협정으로 전범기업 제품 구매를 완전히 제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를 자제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황대호 경기도의원도 "일각에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한다거나 비이성적으로 접근해 한·일 갈등을 조장하는 조례안으로 왜곡될까 우려된다"면서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근현대사와 현재가 동떨어지지 않고 연결돼 있음을 알리고 전범기업 제품을 쓰더라도 제대로 알고 쓰자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곽태영 기자 tykwa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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