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면 기초과학연구원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장

고대 로마인들은 영토가 넓어지면서 로마로 통하는 가도나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도교, 도시의 도로망 등을 대규모로 건설하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이러한 대규모 사업들은 로마 황실이 주체가 돼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수행했다. 그런데 로마의 이런 대규모 공공사업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로마에서는 우리가 공공시설물을 칭하는 ‘인프라스트럭처’(사회를 이루는 하부기본구조)에 해당하는 말을 문헌에 남기지 않았을 뿐더러, 대규모 사업에 있을 법한 기념비조차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조그마한 강에 다리 하나를 건설해도 언제, 누가, 얼마를 투입해서 이 다리를 건설했는지, 이 다리를 건설한 이유가 무엇인지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기공식까지 성대하게 개최하며 홍보에 열을 올리는 오늘의 현실과는 사뭇 대비된다.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대사업’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990년대부터 한강 다리의 건설비용과 맞먹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대형연구시설구축사업이 가능하게 됐으며, 오늘에 와서는 수십 킬로미터 고속도로의 건설과 비등한 초대형 기초과학연구시설의 구축도 진행되고 있다. 이는 국가경제가 성장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이 나아지면서 대형연구시설에 대한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확보된 바탕에, 과학계의 양적 질적 성장으로 이런 연구시설을 필요로 하는 연구자들의 요구가 드러나고, 여기에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근접한 우리나라가 특별히 과학 분야에서도 선진대열에 올라서기를 기대하는 국민들의 성원이 부응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대형연구시설구축사업은 그 특성상 공공재정투입을 정당화하는 공공성(즉 공공을 위한 예상 산출물)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평가하기 어려워, 늘 비슷한 규모의 다른 공공기반사업과 비교돼 평가절하당하기 일쑤다. 때문에 사업기간 내내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사업을 진행시켜야 하고, 매년 예산의 확보나 결산에 있어 대형연구시설구축사업에 필연적인 불확실성이나 사업관리상 리스크와 같은 특수성이 고려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로마 역사를 다룬 베스트셀러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그 옛날에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은 십만 킬로미터가 넘는 간선도로를 건설해내던 로마인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대사업을 이루어 갔을 지를 담담히 짐작해보는 대목이 나온다. ‘인프라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사회 하부기본구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일찍 깨달았던 민족이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조차 만들지 않고 그 흔한 기념비조차 남기지 않았던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이 일은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대사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해 온 로마의 가도 또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이용하는 고속도로나 다리와는 달리, 대형연구시설은 소수의 과학자들만을 위한 시설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를 통해 산출되는 연구의 결과들이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문명의 발전을 가져다준다면 그 역시 충분한 공공성을 가진 사회적 인프라가 아닐까? 과거 진행됐던 대형연구시설구축사업들이 그 필연적인 불확실성과 어려움을 극복해내며 현대 기술의 발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음을 볼 때, 대형연구시설구축사업도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대사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인공태양 구현을 목표로 국제핵융합로(ITER) 구현에 몰두하고 있는 연구자들, 새로운 희귀동위원소과학의 시대를 열고자 중이온가속기 구축에 열정을 쏟고 있는 과학자들의 생각 또한 로마 가도 건설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핵융합연구시설, 중이온가속기 등이 성공적으로 구축됐으면

우리 과학자들이 천신만고를 겪으며 만들어가고 있는 핵융합연구시설, 우주로켓발사시설, 중이온가속기들이 성공적으로 구축돼, 로마 가도에 못지 않은 중대한 업적으로 인정받아 국가와 인류를 위한 과학발전에 공헌하며 역사에 빛나는 기념비로 오래도록 남기를 바란다.

권면 기초과학연구원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