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이후 여성들 대규모 ‘검은 시위’

미프진 공개복용 시위도

“‘폐지 이후’가 더 중요 ...임신중절체계 마련”

11일 오후 2시 50분경.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형법이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헌법재판소(헌재) 결정이 알려진 순간 헌재 앞에선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이날 오전 9시부터 헌재 앞을 지키며 릴레이 기자회견을 진행한 시민단체들은 “차별을 뚫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침묵하지 않은 이 땅의 많은 여성들과 조력자들이 역사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며 헌재의 결정을 환영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여온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23개 단체의 연합체인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하 모낙폐)은 이날 오후 7시부터 서울시 종로구 서울노인복지회관 앞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환영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는 주최측 추산 1000여명이 모였다.

◆“차별 뚫고 자기 경험 말해” =  제이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은 “지금까지 여성들은 불법 낙태 수술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 2등 시민이었지만 더이상은 아니다”라며 “차별을 뚫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침묵하지 않은 우리들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나영 공동집행위원장도 “임신중지의 경험은 특별한 몇 명 여성들의 경험이 아니다. 수많은 여성들, 우리의 어머니 자매들 친구들 거리에서 만나는 많은 여성들의 겪는 일”이라면서 “그들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 감당해 왔던 경험을 거리에 나와 이야기하고, 국가와 사회에 요구했기 때문에 이번 판결이 있을 수 있었다.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은 여성들의 행동이 만들어낸 역사”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낙태죄 폐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성들의 고발이 큰 힘이 됐다. 2016년 보건복지부가 ‘불법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의료법 개정을 예고하자 여성들은 검은 옷, 검은 모자를 쓰고 참석한 ‘검은 시위’을 열며 반발했다. 낙태죄 폐지 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는가 하면 임신중지 약물로 알려진 미프진을 공개적으로 복용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여온 활동가들은 낙태죄 폐지 자체도 중요하지만 폐지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국회와 의료계의 발빠른 대응이 요구된다.

이번 소송 공동대리인단을 맡은 천지선 변호사는 집회에 참석해 “앞으로 국회와 행정부에서 후속 조치가 이뤄질텐데 여성의 자기결정권 그 외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재생산권을 보장하는 방안으로 법률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료계에서는 낙태 시술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66년 동안 낙태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낙태 시술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자궁 내막을 긁어내는 ‘소파술’이 여전히 통용되는 등 한국의 임신 중절 시술 방식은 낙후돼 있는 실정이다.

◆피임과 임신중지 정보 제공받을 수 있어야 =  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여성위원장은 헌재 결정 직후 “지금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돌려 보내야 했던 많은 여성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면서 “앞으로는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의료인으로서 도와주겠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이제부터 할 일이 더 많다.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유산유도제의 도입, 병원 약국 보건소 등 어디에서나 피임과 임신 임신중지 등에 대해 안전하고 중립적인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시스템 등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도 성명을 내고 “헌재가 낙태한 여성 등을 처벌하는 등 조항이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인정한 것을 환영한다”며 “그동안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던 태도를 바꾼 것에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최 위원장은 “재생산권의 보장, 안전한 낙태를 위한 보건의료제도의 확충, 아이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양육환경 조성 등 사회 전반의 인권 수준 향상을 위한 논의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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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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