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광화문광장 세월호 분향소 자리에 설치된 기억·안전전시공간 '기억과 빛'을 찾았다. 가족과 함께였다. 초등학교 5학년인 큰 딸은 단원고 학생들의 단체사진과 추모작품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기억 문화제도 열렸다. 수천명의 시민이 떠나간 이들과 함께 했다. 자원봉사자들은 아이와 참가자들에게 추모 뜻을 담은 노란 리본과 나비를 달아줬다. 어른들의 탐욕과 무책임이 빚은 세월호 5주기를 앞두고 죄없이 먼저 간 아이들과, 살아남은 내 아이는 그렇게 만났다.

아이와 함께 광화문에 머문 동안 기자는 내내 아이의 눈치를 살펴야했다. 전시와 문화제가 열리는 광화문광장 건너편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손에 들고 '박근혜 석방'을 외치는 시위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마이크에 대고 연신 '문재인 퇴진하라' '김정은 참수해라' '주사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쉼이 없었다. 평소 대한문 앞을 지키던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이 이날 세월호 추모행사를 겨냥해 광화문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였다. 아이의 눈에, 세월호 추모와 박근혜 석방 사이의 분열과 간극이 어떻게 비칠까, 고민스러웠다.

사건은 우연찮게 일어났다. 행사장을 나와 아이 손을 잡고 광화문 뒷골목을 걷는데,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수십명의 어르신이 옆을 지나치다가 "그만 좀 우려먹어라, XXX들아"라고 내뱉었다. 노란 리본과 나비를 몸과 가방에 달았던 우리 부녀를 향한 그들의 분노였다. 아이의 귀를 막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아이는 못 들은척했지만, "우려먹어라" "XXX들아"라는 두 마디는 이미 아이의 귀를 거쳐 가슴에 꽂혔을터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 좌우와 보혁이 경쟁하는건 당연하다. 하지만 수백명의 아이를 떠나보낸 그 날의 참사에 무슨 사상과 정치논리가 있겠는가. 무슨 이견이 있을 수 있는가. 대한민국 어른 모두는 그날의 고통을 공감해야하고, 반성해야할 뿐이다.

부녀의 가슴에 박힌 "그만 좀 우려먹어라, XXX들아"라는 외침의 책임은 누군지 모를 그 어르신에게만 있지는 않다고 본다. 그 어르신도 누군가 부추긴 증오와 왜곡의 희생자일 뿐이다. 일부 우파인사들은 "좌파가 항일독립운동과 5.18, 세월호를 수십년째 우려먹으면서 애국 우파를 공격하는 소재로 삼는다"고 우파진영을 세뇌시킨다. "공산주의자에게 훈장준다" "북한군이 개입했다" "대통령이 술에 취해있었다"는 식의 가짜뉴스로 어르신들의 분노와 증오를 키운다. 젊은 시절, 피로 지킨 대한민국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하는 어르신들은 그들이 부추긴 증오와 왜곡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그 사이 우파인사들은 지지율과 표, 후원금, 광고수익이라는 반사이익을 챙기기 바쁘다.

우파인사들에게 "증오팔이를 그만해달라"고 부탁해야할까. 아니면 나 또한 "그만 좀 우려먹어라"고 되받아쳐야할까. 진영을 넘어 모두가 '증오팔이'에 익숙한 현실을 반성하는게 먼저일까. 아이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외출이었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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