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선 한국사회적기업 진흥원 원장

흰머리소녀는 오늘도 아파트 단지 안 텃밭을 기웃댄다. 언제쯤 씨앗을 뿌리게 될까?

흰머리소녀(이웃이 붙여준 애칭, 소녀 나이는 70살이다)는 서울 강북 번동에 있는 임대아파트단지에 산다. 이사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소녀는 마음을 터놓을 만한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소녀의 수줍은 성격도 한몫 했지만, 비슷한 처지에 서로 공연히 신경 쓸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먹고 사느라 서로 바빴고 그래서 서로 모른 채로 사는 것이 익숙했다. '고독'은 익숙했지만, 몸이 아플 때마다 앞으로 혼자 살아낼 손녀가 눈에 아른거렸다.

소녀의 일상에 변화를 준 사건(?)이 지난해 이 곳 텃밭에서 일어났다. 관리소장의 발상으로 만들어진 텃밭에 또래 주민들이 관심을 보였고, 소녀도 1년 동안 매주 열리는 텃밭학교에 꼬박 출석했다. 20여명의 교육생들은 1년 동안 함께 텃밭을 가꾸며 가까워졌다. 공부도 하고 채소를 가꾸며 요리도 함께 했다. 급기야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음식 대접도 했다. 이사 온지 10년 만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바쁜 시간을 보냈다. 사는 것 같았고 즐거웠다.

흰머리소녀, 사회적경제 만나다

소녀는 올해부턴 텃밭 운영자가 되어 처음 참여하는 이에게 작물 재배, 텃밭관리 요령을 가르친다. 수확물은 지난해처럼 요리가 되어 이웃들의 저녁 식탁에 올라갈 예정이다. 받기만 하던 삶에서(소녀는 기초생활수급자다) 주는 사람이 되었을 때의 감동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소녀에겐 올해 또 새로운 꿈이 생겼다. '사회적 잉여'로 비칠까 움츠렸던 할머니들이 셰프가 되어 매일 매일 아이들의 든든한 밥한 끼를 챙겨주고, 아침부터 이웃 간의 인사로 북적이는 활기찬 '아침 주는 아파트'. 올해 흰머리 소녀의 꿈이다.

공유부엌, 공동작업장처럼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가는 협동경제활동, 사람들은 이를 커뮤니티 비즈니스, 사회적경제라 부른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2년, 사회적경제는 이제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등 형태를 뛰어넘어 도시재생, 돌봄, 생활 SOC 등 각 부처의 특성을 살린 정책과 맞물리며 내용이 풍성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경제 활성화 정책의 핵심은 지역 생태계, 민관 거버넌스이다. 최근 정부 사업의 주된 특징은 지자체를 주요 파트너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주로 공모대상이 지자체이거나 지자체의 매칭 예산을 조건으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정책통합'이다 부처 사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 부처의 사업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 재생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도시재생사업은 주거 및 도로환경 개선, 공동시설과 같은 인프라 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성공적인 도시 재생을 위해서는 주민들 간의 소통과 이에 기초한 공통 요구의 조직화 등 지역 주민들의 역량이 전제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도시재생은 인재 육성 프로그램을 기초로 돌봄 등 다양한 주민들의 욕구를 반영할 비즈니스 발굴과 연결, 사업 추진 주체의 형성, 비즈니스간 협력과 융합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금융 등이 결합돼야 한다. 주민 욕구를 해결할 서비스만 해도 주거 환경 및 아동 보육, 노인 돌봄, 편의점 등 참으로 다양하다.

지역 생태계, 민관 거버넌스, 그리고 정책 통합

이들 서비스가 주민들과 만나는 지점에 사회적경제가 있다. 서비스 수요를 지역에서 충족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거나 인근의 사회적경제 조직과 연계하는 과정에서 일자리가 창출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정 속에서 지역순환형 사회적경제 생태계가 구축되어간다. 사회적경제를 지역 순환경제로 이해하고, 사회문제 해결과 지역 혁신의 핵심 동력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북 번동의 흰머리소녀는 텃밭을 통해 이웃을 얻었다. '아침 먹는 아파트'를 해보고 싶을 만큼 자존감과 희망도 생겼다. '동네부엌'같은 커뮤니티비즈니스가 많아져야 사회적경제가 국민들과 친해진다. 사회적경제의 뿌리는 공동체이며, 사회적경제는 관계를 잇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민주주의 학교이다.

사회적경제가 활성화되려면 정책 융·복합이 더욱 활발해질 필요가 있다. 각 부처의 정책이 지역에서 변화를 만들고 지속가능해질 수 있도록 지자체와 사회적경제 조직도 더욱 긴밀히 협의해나가야 한다.

김인선 한국사회적기업 진흥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