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유럽 싱크탱크 '브뤼헐'

미중 무역전쟁의 결과는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에 굴복한 일본의 쓰라린 과거와는 사뭇 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벨기에 브뤼셀에 소재한 범유럽 싱크탱크 '브뤼헐'은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이 상대적으로 미국에 덜 의존적인 데다 일본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불공정 무역관행과 환율 조작 등의 이유로 중국을 비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1980년대와 90년대 벌어졌던 미일 무역분쟁의 전개과정과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당시 미국은 대규모 무역흑자를 기록하던 일본을 격렬히 비난했고, 오랜 협상을 통해 결국 일본으로부터 과도한 무역불균형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경제적 양보안을 받아냈다. 미국은 일본의 상승 모멘텀을 성공적으로 봉쇄했고 그에 따라 형성된 새로운 경제적 환경에 잘 적응했다.

현재 미중 무역전쟁의 결과로 중국도 일본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될지 비상한 관심이 쏠린다. 이에 대한 브뤼헐의 결론은 '아니오'다.

브뤼헐에 따르면 큰 맥락에서 일본과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한 시기 경제발전 단계가 서로 달랐다. 일본은 인구 고령화와 노동생산성 정체가 두드러지며 경제발전 정점에 근접했을 때 미국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반면 현재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여전히 미국에 비해 적다. 당시 일본에 비해 평균 연령도 더 낮다. 중국의 노동생산성은 현재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이는 제조업과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굵직한 투자를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규모는 경제발전 초기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정점일 당시의 일본보다 상당히 크다. 앞으로 전 세계 수출 비중도 더 커질 전망이다. 브뤼헐은 "중국이 기술적 사다리를 계속 올라가다 보면, 글로벌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존재감은 더 커지게 된다"며 "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계속 도전장을 내밀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이 일본에 비해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에 덜 의존적인 점도 중요하다. 일본은 사실상 미국의 무차별 공격에 쉽게 노출된 먹잇감이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에 예속됐다. 그 결과 미국에 대항할 일본의 협상력엔 한계가 뚜렷했다.

반면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중국은 수입을 늘리는 조치를 취하라는 미국의 압박에 강하게 맞서고 있다. 특히 환율정책과 통화정책 측면에서 그렇다. 일본은 80년대 중반 엔화가치를 대폭 올리라는 미국의 압박에 굴복했다. 또 미국 상품에 대한 자국 내 수요를 자극하기 위해 통화정책을 크게 완화해야 했다.

과거 일본에게 강요된 환율, 통화정책에 중국도 굴복할 것이라고 예상하긴 어렵다는 지적이다. 브뤼헐은 "중국의 수출이 구조적으로 둔화되고 임금이 오르는 상황에서 위안화 강세는 중국 경제에 결정타가 될 수 있다"며 "강한 내수세를 조장해 미국 상품의 수입을 늘릴 수 있겠지만,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과도한 조치는 결국 지나치게 느슨한 통화정책을 낳고, 이는 다시 자산가격 거품을 일으키게 된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은 산업정책을 낮잡아 보면 안된다는 점이다. 일본은 반도체 수입품을 늘리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는 사실상 일본의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 원인이 됐다.

중국 정부의 경제 통제력은 일본보다 강하다. 따라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에 대해 미국 상품의 수입을 늘리라고 강하게 압박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미일 무역분쟁의 전개과정을 보면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양날의 검이었다. 한편에서 보면 정부 개입으로 반도체 등 전략 산업 부문을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수입물량 목표제로 해당 산업의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합의 이후 일본의 반도체 분야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일본 자동차 산업도 비슷한 압력을 받았다. 하지만 민간 부문이 주축이 돼 미국에 대한 대외투자를 늘리면서 그같은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반면 기업의 국영 소유가 많은 중국은 변화하는 경제적 환경에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브뤼헐은 "중국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력을 잃게 만든 수입물량 목표제와 같은 합의를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국은 경제개발의 초기단계에 있다. 앞으로 오랜 기간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미중 무역전쟁은 미일 무역분쟁보다 더 장기간 진행될 수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 전망은 상대적으로 굳건하다. 중국의 경제규모는 언젠가는 미국보다 커질 것이다. 미국에 군사적 의존도 없다. 무역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이 부당하다 여기면 중국은 강하게 거부하고 도전할 전망이다.

브뤼헐은 "이는 조만간 미국과 중국이 합의에 이른다 해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라며 "미국은 일본에 했던 것처럼 쉽사리 중국을 봉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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