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임정 100주년' 가장 주목받은 독립운동가 …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서훈 안돼 유해봉환길 막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김가진은 "이 늙은 마음에 아직 하늘을 찌를 뜻이 남아있다"며, "한 번 날아올라 만리 길"을 달려와 상하이로 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임시정부의 분열과 가난과 병마였다. 일제의 첩보문서 '상하이 불령선인의 궁핍상황'은 김가진이 몇 달 동안 집세와 밥값을 내지 못해 주인으로부터 방을 비우라는 독촉을 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가진의 곤궁한 형편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 윤치호는 "김가진이 상하이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지 않은가"라고 일기에 적었다. 그는 나중에 이상재로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애써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제2의 김가진이 되란 말인가?"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김가진은 자신의 병세를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상하이는 위도가 낮기 때문에 겨울에도 별다른 난방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온돌에서 겨울을 보내 버릇하던 김가진에게는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와 영양부족에서 기인한 각기병 증세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양 무릎 아래로 마비 증세도 자주 왔고, 다리는 퉁퉁 부어오르기 일쑤였다. 종아리 근육을 쥐어짜고 비트는 것 같아 옆에서도 차마 지켜보고 있기 힘든 지경이었다. 한발 한발 떼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마음과는 달리 방구석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상하이 교민들 역시 생활이 매우 곤란했지만, 김가진을 공경하여 자신은 못 먹고 못 입더라도 땔감과 양식을 마련하느라 애썼다고 한다.

동농 장례식 만장행렬│1922년 7월 동농 장례식은 사실상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이었다. 이동녕, 박은식, 김구, 안창호, 이시영, 조소앙, 홍진 등 임정요인들이 장례식을 주관했고, 상하이 교민 절반이 조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상하이 교민 절반이 조문

김가진은 1922년 7월 4일 오후 10시 영경방 소재 셋집에서 "영원히 눈을 감지 못할 원한을 품고 만리타향의 망명 생활 중"에 7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아들 의한,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 조소앙, 이필규 등과 일가인 김우진, 김사한, 그리고 아들 의한의 친구인 우승규 등이 임종을 지켜보았다. 며느리 정정화는 마침 자금을 구해보려 국내에 갔던 터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의 수령"으로는 가장 나이가 많은 김가진의 서거를 크게 보도했다. 김가진의 상하이 망명은 "조선독립을 뜻하는 사람에게 동경"을 받았지만 상하이로 건너간 이후의 고생은 거의 극도에 이르러 팔십지년에 하루 한 끼를 먹지 못하여" "추위와 배고픔이 뼈 속에 사무치다가 별세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7월 7일자 김가진 서거 보도기사에 이어 8일에는 슬픔에 빠진 김가진 일가의 이야기를 사회면 톱으로 사진과 함께 보도했고, 7월 10일에는 김가진의 삼남 김용한이 상해로 떠났다는 기사, 7월 13일에는 상해에서 김가진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기사와 7월 23일 유림연합회에서 김가진의 추도식을 거행할 예정이라는 기사, 많은 사람들이 김가진 가족에게 전해달라고 동아일보사로 부의금을 전했다는 등 3건의 단신을 실었다. 7월 24일에는 김가진 추도회가 열렸다는 것을 보도했고, 8월 4일에는 김가진의 장례식 사진 두장을 사회면 톱으로 크게 싣는 등, 한 달 내내 김가진의 서거와 장례기사를 실었다.

동농 장례식 조문록 김구 안창호 박은식 안정근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승만의 측근 장붕도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김가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상해에 체류하는 남녀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도 1922년 7월 8일자 3면 톱기사로 김가진의 죽음에 상하이의 교민 사회가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이 말로 형언키 어렵다고 보도했다.

김가진의 장례는 7월 8일 오후 상하이 쉬쟈후이 완궈공먀오(徐家匯 萬國公墓)에서 열렸다. 당시 상하이 교민은 5백명 안팎이었는데 조문한 사람이 이동녕, 박은식, 김구, 안창호, 이시영, 조소앙, 홍진, 신익희, 여운형 등 270명, 장지에 모인 사람이 백수십 명에 달했다고 하니 가히 교민사회 전체가 장례를 치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관식에 앞서 열린 추도식에서 당시 임시정부 주석 홍진이 개식사를 하고 대한협회 시절의 비서였던 조완구가 김가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임정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의 부친인 이발과 안창호 두 사람이 추도사를 했다.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으로 이어져

김가진이 못 다한 독립운동을 그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가 이어받아 해방되는 그날까지 흔들림 없이 한 길을 걸었다. 김의한과 정정화, 1900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나라가 망한 직후인 1910년 가을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때 김가진의 나이는 예순여섯, 손자라도 빨리 보고픈 마음에 아들의 결혼을 서둘렀다. 너무 어린 나이였는지라 김의한과 정정화 둘 사이는 차라리 소꿉동무에 가까웠다.

정정화는 한동안 보이지 않던 시아버지와 남편이 상하이로 망명했다는 사실을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 나중에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온 몸뚱이가 전부 담(膽)'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담대했던 스무살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찾아 상하이로 갔다. 뜻 밖에 며느리를 본 김가진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김의한은 한때 철혈단 활동을 하며 임시정부에 대립했지만, 곧 김구의 최측근이 되어 보이지 않게 임시정부의 살림을 챙겼다. 임시정부 비서와 선전위원, 광복군 총사령부 주계, 광복군 정훈처 선전과장,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지냈다. 귀국 후에는 백범과 함께 남북협상에 다녀왔다가 한국전쟁 기간 중 납북되어 1964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아 했던 며느리 정정화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섯 차례나 국내에 드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모신 것도 정정화였다. 그러나 정정화가 그리던 고국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정정화를 맞아준 것은 꽃다발을 든 시민들이 아니었다. 분단된 조국의 남쪽은 미군의 땅이었다. 미군은 콜레라가 돈 상하이에서 왔다는 이유로 해방 후 살아 돌아온 여성 중 가장 오랫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해 온 정정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DDT를 뿌려댔다. 전쟁통에 납북된 남편의 소식을 찾아 헤매던 정정화는 한강다리 끊고 도망갔던 자들이 돌아와 자행한 부역자 처벌의 횡액을 피할 수 없었다. 종로서에 붙들려가 친일경찰들에게 손찌검도 당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까지 살았다. 그래도 그가 남긴 회고록 '장강일기'가 나온 뒤 각종 드라마나 영화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묘사가 훨씬 생생해졌다. 독립운동가들이 그 오랜 세월 어떻게 먹고 자고 살아왔는지 일상을 기록한 것은 정정화가 처음이었다. 독립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도 정정화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김의한 정정화 부부의 유일한 혈육 김자동은 그야말로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자라났다. 민족일보 기자를 거쳐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으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를 번역하기도 했다. 김자동은 90을 넘긴 고령에도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에 앞장서고 있다. 김자동의 두 딸과 사위는 모두 노조위원장으로 활약했으며, 외손자는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명가로 꼽히는 집안이 여럿 있지만, 김가진 일가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흔히 나라 팔아먹은 친일의 흐름이 군사독재로 이어졌고, 독립운동의 큰 흐름은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으로 이어졌다고 이야기한다. 김가진 일가는 조선 후기 자생적 근대화운동이 독립운동을 거쳐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으로 이어지는 면면한 흐름이 한 집안 안에서 나타난 보기 드문 사례이다. 안타까운 일은 김가진의 셋째 아들 김용한이 아버지의 장례를 다녀오다 의열단의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후 정신병에 시달리다 1926년 7월 자살했다는 점이다.

이산가족의 아픔│동농은 상하이 송경령능원, 아들 김의한은 평양 애국열사릉, 며느리 정정화는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다. 사진은 2014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동농 일가의 독립운동을 조망한 '조국으로 가는 길' 에 전시된 모조 비석. 이산의 민족적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시 김가진을 생각한다

김가진이 살았던 시기는 정말 격변의 시기였다. '아리랑'의 작가 님 웨일즈가 절묘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당시의 동아시아는 "한 세대 동안에 역사가 천 년이나 흘러가고" 있던 곳이었다. 이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며 역사의 중심에 섰던 인물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김가진은 77년이라는 짧지 않은 인생을 장거리 선수가 아니라 단거리 선수처럼 전력 질주했고, 말년에는 그야말로 번지점프를 하듯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었다.

오백년 왕조가 나락으로 떨어지던 결정적인 시기에 김가진은 당시로서는 최대의 야당이라 할 수 있는 대한협회의 총재였다. 그 엄중한 시기에 대한협회 회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은 김가진의 입장은 안타까울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망했을 때 그는 일본이 주는 작위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 사실 자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된 일이었다.

대한협회 회장 시절이나 망국 직후의 김가진은 나라와 유교 문명이 망해가는 거대한 흐름 앞에 어쩔 줄 모르고 끌려가고 있었다. 김가진은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불꽃같이 살았다. 그 극적인 반전이 없었더라면 김가진은 개화파에서 친일로 흐른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 정도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김가진의 생이 감동적인 점은 그가 오류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범한 오류를 과감히 바로잡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는 결코 오류와 한계를 그대로 놓아둔 채 망국의 대신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지 않았다. 망국대신 김가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망명을 하여 임시정부로 와서 '민국의 신민(新民)'으로 거듭났다. 고종의 죽음과 3.1운동을 거치며 대한제국의 신민(臣民)들이 대한민국의 신민(新民)으로 변신할 때 74세의 김가진은 선두에 섰던 것이다.

서훈되지 못한 독립운동의 수령

최근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를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나오고 있다.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분들 중에 서훈되지 못한 분들도 있고, 또 남의 공적을 가로채거나 허위사실을 조작하여 부당하게 서훈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분단현실 속에서 대부분 응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김가진은 사회주의자도 아니면서 참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올해 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을 맞으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언론의 관심을 끈 인물은 김가진이었다.

2014년 서울역사박물관은 '조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 하에 김가진 일가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전시회를 기획하여 20만 명의 시민들이 관람했다.

KBS가 2018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특집으로 방영한 '돌아오지 못한 독립투사들'에서는 김가진을 가장 중요하게 조명했다. KBS는 이어 2019년 4월 1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획 '항일비밀투쟁, 최후의 1인까지'에서 조선민족대동단과 그 총재였던 김가진의 활동을 자세히 소개했다. KBS는 2019년 4월 30일 임시정부 100년 특집으로 '수당 정정화'를 방영하며 당연히 정정화를 독립운동으로 이끈 김가진에 대해서도 집중 조명했다.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는 2019년 4월 29일 "친일파가 심사하고 친일파가 받은 건국훈장"이라는 주제로 마땅히 서훈 받았어야 할 김가진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서훈심사에서 번번이 배제된 사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면을 통해 김가진이 재조명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와 같은 사실은 김가진에 대한 일반 국민들이나 언론의 인식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준다.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2019년 독립유공자 심사를 앞두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이만열 교수,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윤경로 교수, 한국사연구회회장을 지낸 박찬승 교수와 필자 등 한국근현대사 전공자 몇몇이 김가진 선생의 서훈과 관련한 의견서를 냈다. 2006년 서훈신청 당시에도 대한민국에서 친일문제 연구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동농 김가진 선생 서훈에 관한 의견서'를 통해 김가진의 서훈 보류가 부당함을 밝힌데 이어, 학계가 제출한 두 번째 의견서이다. 이 의견서에서 이만열 교수 등은 대동단원으로서 총재 김가진의 지시에 의해 시위에 참여하거나 김가진 명의의 신임장과 독립운동 자금 갹출 권고문을 들고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투옥되는 등의 사유로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분들이 80명이 넘는데, 그 모든 활동의 정점에 서 있는 김가진이 서훈을 받지 못한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 의견서는 김가진이 서거하자 상하이에 있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조문한 사실을 들어 김가진이 끝내 일제의 작위를 받았다는 불명예를 씻지 못한 친일파였다면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기라성같은 혁명가들이 어찌 자기발로 찾아가 머리를 숙였겠느냐고 물었다. 만약 임시정부의 요인이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유공자 심사를 할 수 있었다면 김가진이 여러 차례 서훈이 보류되는 수모를 겪었을 것인가? 김가진 일가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었던 백범 김구는 이 어이없는 사태를 어떻게 생각할까? 김가진 망명 후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낸 원로 박은식은 김가진의 서훈 보류를 또 다른 통사(痛史)로 기록하지 않을까?

연통제 조직을 활용하여 김가진의 망명을 주도한 도산 안창호는 김가진이 독립유공자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김가진을 대한군정서의 고문으로 초빙하여 독립전쟁을 이끌려 했던 백야 김좌진이 같은 집안이라고 친일파를 모시려 했단 말인가? 김가진의 장례에서 절절한 개식사를 한 임시정부 주석 홍진은 무어라 할까? 김가진이 작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동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이 어떻게 김가진을 임시정부의 최고 원로로 대접하고, 심지어는 대통령으로까지 추대하려고 했단 말인가? 김가진의 친일행위가 그의 독립운동을 덮을 정도였다면, 어떻게 동시대인들에게 김가진 명의로 독립운동 자금을 내라는 권고문이 배포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끝내야 할 김가진 일가의 이산

훗날 독립유공자가 되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선 이는 단 한사람도 없다. 누가 시켜서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독립유공자 서훈이 무엇이 그리 대수겠는가? 그러나 백범의 무릎에 앉아 백범을 아저씨라고 부르던 어린 소년 김자동(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 이제 아흔을 넘긴 나이에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이제 제 나이 아흔을 넘겼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조부의 유해를 모셔오는 일입니다. 상하이 만국공묘에 조모와 나란히 누워 계시던 신규식 선생 등 여러분이 문민정부 출범 이후 국내로 모셔졌지만, 조부만은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셔오지 못했습니다. 자비로 모셔오려 해도 만국공묘가 송경령공원에 편입되어 중국의 국가유적지가 되었기 때문에 정부 간 교섭이 아니고서는 삽 한 번 뜰 수 없는 형편입니다. 백범 선생의 무릎에 앉아 어린 시절을 보낸 저의 평생의 소원 세 가지 중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은 이제 곧 이루어집니다. 통일에도 서광이 비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유해를 모셔올 길이 없습니다. 납북된 아버지는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계시고, 어머니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임시정부 어른들이 세워준 묘비도 파괴된 채 중국 땅에 쓸쓸히 누워 계십니다. 대한민국 100년을 맞아 제국에서 민국을 잇는 할아버지의 유해를 꼭 조국에 모셔오고 싶을 뿐입니다."

과연 우리 역사에 김가진처럼 자신의 죽을 자리를 극적으로 선택한 사람이 있었던가? 그를 더 이상 머나먼 타국 땅에 방치해 둘 수는 없다. 안중근 의사처럼 어디 묻혀 계신지, 수많은 독립군들처럼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몰라 유해를 모셔오지 못하는 것도 후손들로서는 참으로 면목 없는 일이다. 그런데 뻔히 어디 계신지 알면서도 모셔오지 않는 것은 차라리 범죄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내던진 김가진의 독립운동이 서훈됨에 부족함이 있단 말인가? 김가진에게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 것인가?
 

한홍구 교수는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민주자료관장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워싱턴대학교 사학과 Ph.D.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전)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전)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현)

△저서 : '대한민국사 1~4' '유신' '사법부' 외 다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