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위·이사회 연계된 독일-프랑스 대리전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메르켈 본인이 변수"

1998년 유럽중앙은행(ECB)이 설립된 이래 총재 선임은 정치적으로 결정됐다.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적인 라이벌 의식이 개입된 치열한 투쟁이었다. 올해 ECB 신임총재 인선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달 하순부터 ECB 신임총재 선임논의가 진행된다. 새로운 임기는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물러나는 오는 10월부터 시작된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BBW)는 13일 "ECB 총재를 선임해야 하는 올해의 상황은 보다 복잡해졌다"고 분석했다. 사상 처음으로 ECB 총재뿐 아니라 행정부 역할을 하는 'EU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위원장과 회원국 정부 정상들의 모임인 'EU정상회의'(European Council) 의장도 함께 뽑는다. 각 기관 후보 선택이 다른 기관 후보 선정에 반드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 해도, EU 관계자들은 '결정권을 가진 각국 정상들이 3개 기구를 한데 묶어 적임자를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법적 임기는 2021년까지다. 하지만 더 이상 총리직에 미련이 없다는 의중을 종종 내비치고 있다. 그는 현재 유럽연합(EU)에서 가장 강력한 직위인 'EU 정상회의' 의장에 나설 것인지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반면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 대륙을 자신의 구상에 따라 개조하길 원한다. 양국 지도자들은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법적으로 EU는 3개 기구 수장 인선을 국적에 따라 배분해야 한다. 가장 기초적인 기준은 유럽을 남북으로 나누는 것이다. 특정 기구를 독일이 이끄는 북유럽 그룹에 배당했다면 다른 기구는 프랑스가 포함된 남유럽 그룹에 배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북유럽 그룹은 회원국들이 부채와 적자 등에 대한 재정정책 기준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남유럽 그룹은 그보다는 비둘기파적이다. 이는 결국 양 그룹의 국가들이 어느 기구를 장악해야 할지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게 된다는 의미다.

독일 베를린 소재 싱크탱크인 '유럽개혁센터' 수석 이코노미스트 크리스티안 오덴달은 "유로존이 향후 맞닥뜨릴 도전과제, 즉 다음번 경기침체가 올 경우 남유럽에 속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어떤 인물이 ECB 총재에 적합한지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인선 과정은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흐르고 있어 누가 유력한지 도통 알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EU 기구 수장을 한데 묶어 인선한다는 것은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현재 드라기 총재를 대체할 선두주자로 꼽히는 인물은 독일의 중앙은행 분데스방크의 총재 옌스 바이트만이다. 그는 통화정책과 관련해 매파적 견해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가 EU집행위원장에 독일인 또는 독일이 지지하는 국가의 인물을 밀어붙인다면, 바이트만은 차기 ECB 총재가 되기 어렵다. 바이트만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메르켈 총리는 소속 기독민주당과 연정관계에 있는 정치인 만프레트 베버를 차기 집행위원장으로 밀고 있다. 그렇게 되면 ECB 신임 총재에 대한 초점은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인 프랑수아 빌로이 드골로나 프랑스 국적의 ECB 집행이사인 브느와 꾀레에게 옮겨지게 된다.

여기서 더 복잡한 사연이 펼쳐진다. 마르켈 총리가 미는 베버는 유럽 내에서 경량급 인사로 분류된다. EU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난달 EU 정상들의 만남에서 베버는 압도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베버가 낙점받지 못한다면, 마크롱 대통령이 지지하는 인물이 집행위원장을 맡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EU 브렉시트 수석조정관인 미셸 바르니에다. 그는 '원치 않는다'고 손사래치지만, 각국을 돌며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유망한 후보는 마크롱이 속한 중도파 유럽 동맹의 인물이자 반독점 담당 집행위원을 맡고 있는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다.

바르니에 조정관이나 베스타게르 집행위원이 EU 집행위원장으로 간다면, ECB 총재는 바이트만에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EU 이사회 의장을 인선할 조건도 완전히 달라진다.

드라기는 2011년 11월 ECB 총재가 됐다. 유로존 재정위기가 최고조에 달해 유로존의 존립을 위협할 때였다. 그는 2012년 "유로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장담했다. 유로화 붕괴를 막기 위해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으로 통화 확장정책을 썼다.

차기 ECB 총재 후보군에 거론되는 일부는 드라기의 정책을 앞으로도 지속하거나 또는 더 증강시켜야 한다고 본다. 반면 또 다른 일부 후보는 위기 때 썼던 통화정책을 버려야 할 때라고 말한다.

독일은 유로존 최대 경제국이지만, 현재까지 ECB 총재를 배출한 바 없다. 그런 측면에서 바이트만이 매우 유리하긴 하다. 영국 런던 소재 투자자문기업인 '메들리 글로벌 어드바이저'의 정책분석가인 팀 존스는 "독일이 ECB를 원하면 바이트만이 총재가 될 것"이라며 "하지만 독일이 진짜 ECB를 원하고 있을까?" 반문했다.

인선과정에 정통한 EU 관계자들도 '아직도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독일 정부는 공개적으로 옳은 말, 쓴소리를 종종 하지만, 비공개 모임에서 독일 외교관들은 그리 완강하게 고집부리지 않는다고 한다. 독일 인사들은 사적인 만남에서 프랑스 출신 ECB 집행이사인 브느와 꾀레가 ECB 총재가 될 가능성을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프랑스를 혼란시키려는 계략이거나 아니면 메르켈 총리가 다른 기관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ECB 총재 몫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장담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마크롱 본인이 꿈꾸는 유럽을 만들려면 ECB 대신 집행위원장을 가져가야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방향은 유럽 각국이 보다 많은 자원, 보다 많은 재량권을 갹출하자는 것이다.

독일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보다 음지에서 상황을 리드하는 것을 선호한다. EU 관계자들은 "메르켈 총리가 바이트만을 버리는 카드로 쓰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이유"라고 말한다. 다가올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유로존 자본풀을 만드는 계획이나 각국의 부채·재정적자 제한 규정과 같은 정책에서 프랑스가 독일의 의중을 잘 반영한다는 조건에서다.

독일은 심지어 바이트만이 아닌 ECB 총재 후보를 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거론되는 인물은 유럽안정기금 집행이사인 클라우스 레글링이다. 그는 바이트만처럼 ECB 부양책에 대해 거세게 반대하는 매파는 아니다.

EU 관계자들에 따르면 독일이나 프랑스가 아닌 중소규모 국가들은 '우린 들러리냐'며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함께 동의하는 비독일, 비프랑스 후보들은 핀란드 전 중앙은행 총재인 에르키 리카넨이나 현 중앙은행 총재인 올리 렌이다. 렌 총재는 유로존 재정위기 때 EU집행위 경제통화정책 담당 집행위원으로 이름을 알린 바 있다. 네덜란드 중앙은행 총재인 클라스 크노트도 있다. 양성평등을 자랑하는 유럽이지만, ECB 차기 총재 후보군엔 단 한 명의 여성도 없다는 것은 이채롭다.

결국 ECB 차기 총재는 어느 나라 지도자가 자국 후보를 희생할 준비가 됐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달 20~21일(현지시간) EU 정상들이 만나 인선을 논의한다.

하지만 EU 관료들은 '대세적 예측이 틀릴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거대한 미지수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메르켈 총리다.

BBW는 "메르켈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마지막 순간 EU 이사회 의장에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독일 출신 ECB 총재는 이번에도 어려울 전망이다. 하지만 독일은 훨씬 만족할 것"이라며 "결국 ECB 총재직 인선은 EU 정책과 권력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리전"이라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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