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cancel

내일신문

[국민주치의제도 도입을 위한 특별기고 ⑥]

지역에서 주치의로 산다는 것

등록 : 2019-07-11 12:22:02

정명관 정가정의원 원장

#노부부 이야기

82세인 그는 아내의 혈압약을 타기 위해 매달 혼자서 병원에 왔습니다. 그 전에는 부부가 함께 왔는데, 할머니가 뇌경색 후유증과 심한 관절염으로 5년 전 부터는 바깥 거동을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인근 도시에 살고 있던 무남독녀가 내원해 할아버지의 후두암이 재발해 갑자기 입원하시게 됐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혼자 계시게 된 할머니의 장기요양보험 신청을 위하여 의사소견서를 써야 했기에 직접 진료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날 진료를 마치고 왕진을 갔습니다. 두 분 모두 10년 넘은 단골이었지만 집에는 처음 가게 되었습니다. 간 김에 할머니의 건강 상태를 두루두루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3년째 못하던 혈액검사도 하기로 하고 준비해 갔습니다. 따님과 함께 가파른 언덕길을 20분 쯤 올라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이 먼 길을 매번 다니셨네요. 부모님은 수 십년 동안 살던 동네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방안에서도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는 상태였습니다. 당분간은 딸이 두달에 한번씩 병원에 와서 할머니의 혈압약을 대신 타기로 하였습니다. 병원으로 다시 내려와 의사소견서를 공단에 전산으로 제출했습니다. 섯달 후 할아버지가 다시 병원으로 오셨습니다. 치료가 무사히 끝난 모양입니다.

#임산부 이야기

단골 환자 한 분이 걱정스러운 듯이 왕진이 가능하냐고 물어왔습니다. 임신 후반기인 며느리가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뼈가 두군데 부러져서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깁스를 한 채 3일 전에 퇴원하여 집에 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술 부위 소독을 해야 하는데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병원에 가기도 여의치 않고 동네 의원에 데리고 나오기도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점심시간에 소독 준비를 해 가지고 직원과 함께 좁은 골목을 지나 층층계단 위에 있는 집에 가 보니 만삭의 임신부가 오른쪽 발목에서 허벅지까지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데 중환자는 아니었으나 꼼짝도 못하는 상태라 도저히 병원으로 오기에는 힘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깁스를 풀고 수술 부위 소독을 하고 다시 깁스 착용을 한 후, 다음에 병원에 갈 때까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일러준 후 돌아왔습니다. 의원에서 10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지만 아마도 이 환자가 간단한 처치라도 받기 위해서 병원으로 가려면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높은 계단을 내려가야 하고 택시나 앰뷸런스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 환자는 그렇게 수고스럽게 해서라도 병원에 가야할 만큼 응급환자는 아니었습니다.

#쇠약해진 노인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런 저런 일로 가끔 진료를 받으러 오시던 90세 가까이 되신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몇 달 전부터 걸음이 뜸해지셨는데 역시 진료 받으러 다니던 아들이 조심스럽게 아버지가 얼마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보행도 힘든데 혹시 독감 예방접종하러 집으로 와 주실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현 의료제도에서는 언뜻 들으면 황당한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나도 얼마 전에 고령의 아버지가 대퇴골 골절로 수술을 받아 거동이 편치 않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 점심 시간 직전에 오시면 함께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지역에서 주치의 의사의 역할은 대학병원의 의사와는 다릅니다. 첨단 의료기기로 무장하고 전문 의료를 행하는 곳이 대학병원이라면, 주치의의 역할은 범람하는 의료정보 속에서 환자에게 올바른 의료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문제를 가진 환자들이 가장 먼저 찾아와서 상의하는 곳이고, 중병은 아니지만 이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찾아가서 돌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지역의 개원의사와 대학병원 의사들의 역할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에 가벼운 병으로도 큰 병원을 찾을 수 밖에 없고 환자들이 믿고 상의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환자는 불편해지고 병원비는 상승하였지만 만족도는 오히려 떨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소득 격차에 따라 건강불평등도 커졌습니다.

고령화가 진행되고 복합만성질환자가 늘어나고 입원보다는 지역에서 돌봄과 의료를 제공할 필요가 증가하였습니다. 그러자면 환자마다 주치의가 필요합니다. 환자마다 여러 전문의를 찾아다니게 할 것 이 아니라 일차의료전문의사가 주치의가 되어 환자들의 의료 문제를 통합적으로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대통령이나 재벌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자신의 주치의를 가지게 된다면 보건의료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치의 역할은 몇몇의 헌신에 의한 자발적인 노력이 아니라 제도로서 뒷받침될 때 의사도 환자도 만족할 수 있고 전국민이 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국민주치의제도 도입을 위한 특별기고 연재기사]

twitter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