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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⑭ 농지개혁·지방자치 그리고 친일 청산]

친일청산 나선 국회 반민특위, 이승만정부 방해로 무력화

헌법 101조 따라 정부수립 직후 반민법 만들어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특위 11개월만에 와해

등록 : 2019-07-11 11:08:26

해방이후 헌법에 따라 시도한 친일 청산은 실패했다. 친일청산은 제헌국회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였다. 농지개혁문제와 함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제헌헌법 제101조는 '이 헌법을 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했다. 형벌불소급 원칙의 예외를 두며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벌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제헌국회 특별법기초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안' 초안을 본회의에 회부, 1948년 8월 17일부터 독회에 들어갔다. 반민족 행위자의 처벌대상범위와 형량을 놓고 20여일간 격론이 벌어졌고 친일세력의 난동 등 반발도 이어졌다.

1948년 12월8일 반민특위 재판광경과 1949년9월22일 반민특위조사부기념사진 자료 국회 도서관 제공


1948년 9월 7일 본회의에서 반민법안이 가결됐다. 정부수립 한달도 안돼 반민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제헌국회의 친일파 비중이 4.8%에 불과한 때문이었다고도 했다.

이승만정부가 반민법을 거부하기로 결정했지만 제헌국회는 '양곡수매법안'을 부결시킬 수 있다는 카드로 압박했다. 결국 반민법은 9월 22일 공포됐다.

10월 1일 10명의 의원들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1949년 1월5일 중앙청 206호실에 반민특위 사무실이 마련됐다. 기업인 박흥식 체포로 친일파 청산이 시작됐다. 2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활동에 제동을 거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자 제헌국회는 이틀뒤인 2월 17일에 담화 취소를 요구하는 동의안을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2월22일 정부가 제출한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은 2월24일 국회는 '폐기'를 의결했다.

날카롭게 친일파를 겨냥한 제헌국회 주도의 반민특위는 미 군정의 비호아래 이승만정부의 조직적 방해로 사실상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

노덕술 등 친일파 경찰간부가 체포될 단계에 이르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특위 활동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담화를 1949년 5월20일에 발표했다. 이날 이문원 등 3명의 의원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는 '국회 프락치사건'이 터져 나왔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남로당과 연계돼 그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그들의 지침에 따라 정치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이들과 같은 소장파인 김용현 의원 등의 요구로 임시국회가 소집, 석방결의안이 제출됐으나 부결됐다. 소장파 리더인 김약수 국회부의장까지 남로당 중앙위원인 이삼혁과 접선하고 국회내에 남로당프락치를 구성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됐다.

소장파가 몰락했다. 이 사건의 진상규명은 한국전쟁 발발로 흐지부지 덮어졌다. 반민법 제정에 적극적이던 소장파 의원들이 국회 파락치 의혹에 휩싸이면서 힘을 잃자 경찰이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포위하고 특위요원 35명을 연행했다. 특경대도 강제해산됐다.

6월 제헌국회는 내무부가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특경대경찰을 체포하는 등 불법행위를 자행한데 대해 국무총리 이하 전 각료의 퇴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아무일도 할수 없었던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은 7월 7일에 총사직을 선언했다. 결국 반민특위 는 8월 31일 11개월간의 업무종료와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승만정부는 1949년 10월 남로당 등 좌경정당 및 사회단체 133개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후 제도적으로 용인되고 있던 공산당계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합법적 조직기반을 잃었다.

미 군정이 일제의 조선관리를 눌러앉혔고 이승만 정부도 이들을 그대로 둠으로써 정계는 물론 각계 각층에 친일세력이 안존했었다.

당시 상황을 제헌의원들은 국회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행정부 공무원 임용시 경력사항을 넣도록 하였는데 이 경력요건을 충족하면서 고위직 행정공무원에 임용될 수 있는 사람은 일제시대 관리생활을 하면서 친일을 한 사람이어야만 되었다.

독립운동이나 반일운동을 하다가 관료 등의 친일적 행위를 안 한 사람은 관료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공무원법 개정에 노력했고 성공했다"며 "친일 반민족주의자들을 색출하는 반민특위 활동중 중부경찰서의 테러를 받고 활동이 중단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했다.

발부된 영장은 408건이었다. 입건 682건에 검찰송치 559건이었다. 재판에 의해 종결된 것은 고작 38건. 선고내용을 보면 징역 1년에 집행유예가 4건, 징역2년에 집행유예가 1건으로 4건이 구속됐다가 풀려났고 징역 1년이 3건, 징역 1년 6월이 1건, 징역 2년6월이 1건, 무기징역 1건. 사형 1건이었다. 피고인들은 1950년 봄에 모두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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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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