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노사발전재단 사무총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노동기구(ILO), 자유무역협정(FTA) 등 국제기구 가입 및 무역협정은 회원국 또는 합의 당사자간에 그에 걸맞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고 있고, 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은 국가간 신뢰의 문제이자 국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국제기구 가입이나 FTA 체결시 그런 약속이행이 전제된 것이다. 즉 ILO 기본협약 비준을 약속한 것이다. 기본협약 비준의 필요성은 ‘1998년 ILO선언’으로 더욱 커졌다. 1998년 제 86차 ILO 총회는 자유무역과 노동권 존중을 포함한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논의 끝에 아동노동 금지, 강제노동 금지, 차별금지 및 양성평등, 결사의 자유 보장 등 4개 사항에 대한 8개 협약은 세계무역시스템에 참가하는 모든 ILO 회원국이 준수해야 한다는 ‘노동 기본권리와 원칙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기본협약, 1998년 ILO선언 이후 다양한 무역협정에 포함

이후 ‘1998년 ILO 선언’은 다양한 무역협정에 포함되기 시작했고, 특히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과 유럽연합(EU)의 FTA는 ‘1998년 ILO 선언’의 준수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한-EU FTA도 제13장 무역과 지속가능한 발전은 다자간 노동기준과 협정에서 ‘1998년 ILO선언’ 준수를 규정하고 이에 대한 모니터링과 실효성 확보를 위해 국내 자문단과 시민사회 포럼 및 전문가 패널 등 분쟁조정 절차를 두고 있다.

6월 말 EU와 FTA에 서명한 베트남 사례는 ILO 기본협약 비준과 관련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5년 협상을 끝내 놓고도 4년이 지난 뒤 EU·베트남FTA(EVFTA) 서명식이 열린 것은 EU가 노동자들에게 결사의 자유와 단체 교섭권 보장을 요구했으나, 베트남이 버텼기 때문이다. 결국 베트남이 EU의 요구를 수용하고 EU가 베트남 국제협약 이행 의지를 평가한 결과물이 EVFTA이다.

EU가 특별히 베트남에 깐깐하게 군 이유에 대해, 이 사안에 깊숙이 관여한 바 있는 ILO간부는 EU FTA 협정문에는 ‘8개의 핵심협약 중 비준이 안된 협약의 비준을 위해 지속 노력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EU 회원국들 사이에 EU와 FTA를 맺은 한국 등 여러 나라들이 이 약속을 저버리고 있다는 비판이 고조돼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저 상황인데 베트남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며 베트남에게 FTA 서명 전에 신뢰할 만한 조치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한편 우리 고용노동부는 22일 ILO 미비준 4개 기본협약 중 3개 협약에 대해 외교부에 비준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그간 첨예한 쟁점이었던 비준과 입법을 동시에 진행하는 ‘투 트랙’전략으로 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계속 끌었던 ILO 기본협약 비준에 속도를 내는 까닭은 국내외 상황이 녹록치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부는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합의 후 이를 추진하려했지만 경사노위는 5월 이후 공전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유럽연합(EU)이 이를 빌미로 한·EU FTA 위반을 주장하고 있다. EU는 지난해 12월 정부간 협의요청에 이어 지난 7월 초 한국의 ILO 기본협약 미비준과 관련해 전문가 패널 소집까지 요청한 상태다. 전문가 패널 소집은 사실상 무역 제재를 위한 절차다. 패널이 한국의 한·EU FTA 위반 결론을 내리면 통관 강화 등 여러 비관세 제재를 받을 우려가 크다. EU의 공공조달부문은 GDP의 약14%를 차지한다. 사회적, 윤리적, 환경적 구매는 공공기관이 오랫동안 사회정책을 지지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활용한 도구다. 그러던 것이 국제무역협정의 확산, 무역자유화, 반보호주의 규정과 함께 비관세장벽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칫하면 우리는 FTA 역사상 최초로 노동 조항을 위반한 ‘노동권 후진국’이란 오명을 쓸 우려도 있다.

“ILO 기본협약 비준없는 좋은 일자리 논의는 어불성설”

노사발전재단과 ILO와의 공동워크숍에서 ILO 간부는 “협약비준은 한국정부가 국제사회에 글로벌 플레이어로서 자격을 갖추는 조건”이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키는 국가라는 비즈니스 명함같은 것”이라며 “한국은 경제 사회적 발전 정도로 볼 때 비준을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같은 자리에서 국제노사관계전문가는 “ILO 기본협약 비준없는 좋은 일자리 논의는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