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진 에너지전환포럼 공동대표 전주대 교수

지난 20일 독일 정부는 기후변화 대응책의 하나로 자동차연료 및 난방유 소비에 대한 탄소배출량 가격제 도입을 결정했다. 이것은 2021년 1t당 10유로부터 시작해 2025년에 35유로에 이르도록 세금을 부과하는 사실상의 탄소세이다. 에너지전환과 4차 산업혁명의 선도국가로 인정받는 독일이 이처럼 과감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배경에는 흔들림 없이 버팀목 되어주는 원전제로와 에너지전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자리하고 있다. 탈핵이라는 용어만 꺼내도 벌집 쑤셔 놓은 듯 논란이 심한 우리에겐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현재의 에너지전환과 ‘원전 제로’ 정책이 한때는 원전 폐쇄 기간 연장까지 시도한 메르켈 보수정부 하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르켈 정부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기존의 태도를 바꾸어 윤리위원회라는 중립적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내린 탈핵 결정을 채택하였는데, 이것을 정책전환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맞는 말이다.

아래로부터 시작해 정치적 합의를 이끈 독일

그러나 자칫 한국에서도 원자력갈등이 메르켈식의 중립위원회와 공론수렴 방식을 통해 잘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오산이다. 독일은 이미 1970년대부터 강력한 환경운동의 기틀이 잡혀 있었고, 체르노빌 사고를 계기로 대안에너지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급격하게 형성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1998년에 녹색당 연정까지 탄생했다. 그리고 독일 에너지전환의 사회적 합의는 전문가, 시민, 에너지전환기업, 선도적 정치그룹 등이 끊임없이 대안을 제시하고 발전시키며 사회와 정치, 시장의 영역을 확대해온 결과물이다.

적-녹 연정이 들어선 이후에도, 독일정부가 탈핵공약을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지난한 합의과정이 필요했다. 정부가 1년 반 동안 수차례의 무산위기를 겪으면서 전력사업자와의 탈핵합의를 이끌어냈고 이를 법제화한 정책을 임기 절반이 지나서야 시행하기 시작했으니, 정부의 소신과 의지, 그리고 인내가 없었다면 사실상 이뤄지기 힘든 일이었다.

이처럼 굳건한 사회적 동의와 적녹연정이 구축한 정치적 합의가 있었기에 잠시 흔들렸던 메르켈의 원전정책도 후쿠시마 사고 이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윤리위원회도 단순한 중립인이 아닌 인간과 생태적 관점에 있어 대단히 ‘윤리적’이고 식견 있는 전문인들로 구성됐었다.

정부의 정책전환 의지와 설득의 노력이 선행되길

최근 사용후핵연료 재검토위원회가 전문가 검토그룹 구성에 나서면서 다시 논란의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다. 사용후핵연료라는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를 놓고도, 기계적 중립위원으로 꾸려나갔던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비판이 크다. 게다가 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2015년 최종보고서가 나오기까지 사용후핵연료 공론화과정에 시민사회가 철저히 참여를 거부했을 정도로 절차에 대한 불신이 강하게 남아있는 상황이다.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갈등해결의 차원을 넘어 국가에너지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미래지향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업이다. 그러므로 미래 에너지에 대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신뢰 회복 및 합의와 설득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뜩이나 첨예한 대립정국으로 나라가 뒤숭숭한데, 또 다른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에 대한 접근방식을 출발부터 다시 검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