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행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한국 경제발전의 화려한 이면에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고 불리던 기능인이 있었다. 이들을 양성했던 고도성장기 직업교육은 기술보국 가치 아래 대규모 기능 인력을 양산하는 시스템이었다. 아침 구보로 시작하는 짜인 하루 일과, 칸막이식 실습 공간, 단순 반복적 실습 등 병영 같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산업 역군’으로 길러졌다. 교육이라기 보다 소위 ‘훈련’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어울릴 정도였다.

‘기계공고 1기’로 훈련식 직업교육의 산증인이기도 한 필자는 2017년 12월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에 취임했다. 취임 후 전국 36개 캠퍼스를 돌아보면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실습장비는 첨단화됐고 교육환경은 쾌적하게 변했다. 하지만 전통적 칸막이식 교육은 필자가 교육받던 그 시절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칸막이식 교육 벗어나야

대표적인 공공 영역인 교육기관들은 변화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공공성이라는 명분으로 인해 기업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 교육기관, 나아가 공직사회의 특성과 조직 문화는 때론 ‘무사안일’ ‘복지부동’ 같은 부정적인 행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눈높이가 높아진 국민들이 공공부문의 정책 성과를 체감하기란 쉽지 않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적극 행정’이다.

지난해 독일의 제조업 혁신 전략 ‘인더스트리 4.0(Industrie 4.0)’을 배우기 위해 오른 출장길에서 보훔대학(Ruhr University Bocun)을 방문했다. 이 대학은 지역 유망산업인 기계공학 분야 설비를 갖춘 ‘러닝팩토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학교운영 시스템에 대해 설명을 들을수록 감탄보단 오히려 자신감이 생겨났다. 우리의 역량과 노하우만 잘 활용하면 더 잘 할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귀국 후 독일 경험을 살려 학교에 적극 행정 개념을 도입했다. 그 결과 지난해 12월 인천캠퍼스에 첫번째 러닝팩토리가 문을 열었다. 독일 모델을 기반으로 우리 환경에 맞게 발전시킨 러닝팩토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제품 생산 전 공정을 하나의 공간에서 이뤄지도록 장비를 배치한 통합 실습장이다. 기존 실습장과 가장 큰 차이는 전통적인 칸막이식 학과 운영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다양한 학과 학생이 한 곳에서 협업을 통해 프로젝트 실습을 할 수 있다. 올해는 원주, 김제, 춘천 등을 시작으로 16개소에 설치하고 내년에는 전 캠퍼스로 확대한다. 이 공간은 학생은 물론 국민이 변화를 체감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개방적으로 운영한다. 학생들의 창의 재량활동과 지역 기업의 시제품 제작 지원 등 다각적인 활용 방안을 마련 중이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염려 속에서도 러닝팩토리 구축에 열을 올린 이유는 하나다. 4차 산업혁명으로 명명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지금과 다른 미래 역량을 요구한다. 직업교육도 단일 공정, 단일 장비에 국한되기보다 제품 설계부터 완성까지 전 공정 단계를 아우르는 통합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학생의 역량을 발현하는 교육 공간 역시 바뀌어야 하는 까닭이다.

2007년 애플은 휴대폰, 모바일 인터넷, 그리고 아이팟이라는 세 가지 주요기술을 융합한 아이폰을 시장에 내놨다. 전세계 휴대폰 시장을 뒤집는 대 변혁의 시작이었다. 반면, 당시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인 노키아는 시장 환경 변화에 적기 대응하지 못해 순식간에 시장에서 낙오됐다.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구태를 고집하는 방식으로는 조직의 생존마저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러닝팩토리는 시대 변화를 읽고, 직업교육 혁신의 물꼬를 튼 의미 있는 출발이라고 자부한다. 물론 처음부터 모두가 뜻을 같이한 건 아니다. 내부에서 마냥 좋은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었다. 왜 우리가 바뀌어야 하는지 구성원을 설득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러닝팩토리로 새로운 도전

최근 공직사회가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조직 문화 쇄신을 위해 ‘적극 행정’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이는 바람직한 일이다. 적극 행정이 거창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는 현장과 정책의 괴리를 줄이는 노력이다. 혁신은 현장에서 일어난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관의 책무로 ‘찰물(察物, 물정을 살핌)’을 강조했음을 되새겨볼 만하다. 적극 행정을 통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정부 혁신이 시대가 요구하는 현장성 있는 정책이 곳곳에 펼쳐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