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냉전 당시 소련 아냐 … 혼동하면 치명적 위험" 에서 이어짐

버지니아대 명예 역사학 교수 멜빈 P. 레플러는 미 시사월간 '애틀랜틱' 최신호 기고에서 "미국 지도자들은 이런 상황의 재발을 막겠다고 결심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국방 계획가와 민간 정책가들은 소련의 계획적인 군사도발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련은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엔 너무 약하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다'고 미국은 확신했다. 하지만 스탈린이 전 세계 사회경제적 불만세력들을 이념적으로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은 우려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집권해 소련의 영향력 하에 놓일 수 있다고 봤다. 또 미국 내 여론이 1차 세계대전 직후처럼 '전 세계 파견된 미군을 본국으로 소환하라'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독일과 일본이 소련에 포섭될 가능성이 컸다.

소련은 경제적으로 전쟁 능력을 축적할 것이었다. 만약 미래에 대한 오판으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소련은 미국과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평화 시기라 해도 소련의 도전은 심각할 수 있었다.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1945~53년 재임)은 "공산주의가 자유 국가들을 흡수한다면, 우리는 보급원천들로부터 고립될 것이고 우방국들과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방어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이는 미국 경제를 파산시킬 수도 있다. 또 삶의 양식이 크게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요새국가가 돼야만 한다. 중앙통제 시스템을 갖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면 미국은 우리가 알아왔던 것과 다른 나라가 된다"고 경고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미국은 봉쇄정책을 추진했다. 소련 모스크바에서 상황 전개를 지켜보던 조지 F. 케넌 주 소련 외교관은 1946년 2월 워싱턴에 '소련과 항구적인 평화협정은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전신을 보냈다. 당시 최고의 소련 전문가였던 그는 "따라서 미국은 소련의 확장을 봉쇄해 소련의 경제적, 사회적 체계를 뒤흔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케넌의 보고서는 미국의 대소련 냉전정책의 근간이 됐다.

워싱턴 정가와 외교가에서 케넌의 전신은 큰 공감을 샀다. 그는 미 국무부 내 신설된 정책기획국의 국장으로 임명됐다. 미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뒤 국무장관으로 내정된 조지 C. 마셜이 그를 발탁했다. 케넌은 정책기획국장으로 봉쇄정책의 기초를 입안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산업국가들, 즉 서독과 서유럽, 일본 등을 포섭하는 소련의 능력을 분쇄하는 것이 봉쇄정책의 핵심이라고 봤다. 그러려면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제를 복구시켜야 했다. 그래서 마셜플랜이 나왔다. 케넌은 마셜플랜의 틀도 잡았다. 공산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서유럽의 이익을 위해 서독의 경제회복을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케넌은 유럽을 부흥시키고 독일과 일본 경제를 재건하는 조치는 소련의 대응을 촉발할 것이라고 봤다. 서독을 되살려 서유럽과 연계시키면 독립적인 독일의 산업력 또는 강력한 서구블록을 재건한다는 의미였다. 이를 위협으로 인식한 소련은 동독의 베를린을 봉쇄하면서 미국과 영국의 노력을 좌절시키려 했다. 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비행기를 통해 베를린에 물자를 공급하는 한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출범시킬 준비를 하게 된다.

유럽에서 수적 열세에 놓인 스탈린은 시선을 극동으로 돌렸다. 중국 공산당 지원을 강화하고 김일성의 북한 집권에 조력했다. 소련은 1949년 8월 미국에 이어 2번째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일본 히로시마의 사상 첫 원폭 투하가 이뤄진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소련의 핵능력 성취로 향후 미국의 위험 부담은 크게 고조됐다. 미국은 서둘러 수소폭탄 개발에 나섰고, 냉전의 장기화를 위한 전략을 입안했다. 골자는 미군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서독과 서유럽, 일본의 경제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련의 확장정책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맞선 미국과 영국, 소련의 '대동맹체제'는 단 5년 만에 해체됐다. 이제 전 세계는 악몽과 같은 냉전으로 소용돌이처럼 빠져들었다.

미중관계, 냉전에 빗대는 건 부적절

냉전의 초기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날 미중관계를 당시 냉전에 빗대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알 수 있다. 지난 30년은 강대국들 사이의 평화, 전 세계의 유례없는 경제 성장, 수십억 인구의 빈곤 탈출로 기록된 시기다. 냉전 직전 30년처럼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점철된 시기가 아니다. 당시엔 세계 무역량이 줄어들고 양차 대전 사이 보복적 관세조치가 난무했던 반면 지난 30년은 전 세계 교역과 외국 투자, 자본 흐름 측면에서 큰 진전을 기록한 시기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자본주의 서구 경제와 단절해 고립 성장을 고수한 소련과 달리, 중국은 국제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허브가 되겠다며 노력해왔다.

냉전이 시작됐을 때 미국은 소련과 무역을 하거나 소련에 투자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은 소련을 고립시킨 데 따른 경제적 불이익을 사실상 받지 않았다. 오늘날의 맥락은 다르다. 국제경제의 상호의존성, 복잡다기한 공급망, 중국의 막대한 달러자산 등을 특징으로 한다. 과거의 냉전 정책을 오늘날 국제경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맥락에서 다시 꺼내든다면, 그 결과는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다.

지정학적 권력지형도 크게 달라졌다. 냉전 초기 소련은 유럽과 아시아의 권력 공백을 활용할 수많은 기회를 얻었다. 현재의 중국은 부유하고 자부심 넘치는 선진국 일본, 빠른 성장세와 민족주의 성향을 갖춘 인도, 과거 소련 영토의 상실을 분개하는 러시아, 역동적이며 경쟁력을 갖춘 한국 등에 둘러싸였다. 중국의 기회는 풍부하지 않다. 사실 중국은 봉쇄됐다. 중국은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다. 1945년과 달리 미국은 아시아에 오랜 동맹국과 군사기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미군은 과거처럼 본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하지 않는다. 유럽 제국의 붕괴로 소련은 냉전 초기 혁명적 민족주의 물결에 편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식민해방 혁명운동의 시대는 오래 전에 막을 내렸다.

소련이 자본주의를 뒤엎자며 무산자 계급에게 보낸 정의와 평등의 메시지는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공감을 얻었다. 반면 중국은 전 세계를 상대로 선동할 이념을 갖고 있지 않다. 오늘날 중국은 서구 민주주의를 비난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찬양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 세계는 중국이 자본주의적 정신과 민족주의적 열망을 동시에 갖춘 나라임을 똑똑히 알고 있다. 중국은 과거 소련처럼 자국을 평등과 정의의 수호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중국은 이웃하는 나라들 내 불화를 조장하면서 이익을 얻는 능력도 없다. 인도에서 극한 핍박을 받는 이슬람교도들은 중국을 자신의 구원자로 여기지 않는다.

오늘날 조건은 냉전 초기 조건과 전혀 다르다. 소련은 폴란드와 같은 나라들을 흡수했다. 중국은 남중국해에 임시 섬들을 짓고 베트남과 남사군도를, 필리핀과 스카버러 암초를 놓고 다투고 있다. 하지만 냉전 초기 소련이 주변국을 흡수하겠다는 위협과는 성질이 전혀 다르다. 또 중국이 아시아와 유럽의 자원을 끌어들여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 하지도 않는다.

중국과의 전방위 갈등에 따른 혜택보다 위험이 훨씬 크다. 중국을 낙오시키는 데 따른 경제적 비용은 1940년대 소련에게 했던 것에 비해 월등히 많다. 미국은 중국과 냉전을 벌여선 안된다. 냉전을 촉발할 수 있는 조치들을 피해야 한다. 대소련 봉쇄정책은 소련의 붕괴를 목표로 했지만, 현재 미국의 목표는 중국 체제의 붕괴가 아니다.

미국은 중국이 일반국가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미국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은 영국을 몰아붙여 북미 지역 해양과 어업권을 인정받으려 했다.

미국은 자국과 베네수엘라의 분쟁에 영국이 개입해 중미지역 운하에서 이익을 얻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도미니카공화국, 니카라과 등에 개입했다. 반면 영국과 다른 유럽국가들이 인근 수역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관을 넘겨받았다. 미국은 뒤 이어 콜롬비아 내전을 배후에서 조종해 파나마의 독립국가 창설을 도왔다. 그 대가로 운하지대의 영구조차권·치외법권·무력간섭권을 얻었다. 미국은 점차 커지는 자국의 경제적 능력과 외교적 힘을 외부로부터 존중받고자 했다.

레플러 교수는 "미국은 이런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중국의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이해해야 한다"며 "중국을 존중해야 한다. 국제정치를 제로섬게임으로 봐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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