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교육부 정책보좌관실에서 학교 공간 혁신 총괄을 맡고 있는 김태은 국가교육회의 유초중등 전문위원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교사로 재직하던 중 광주시 광산구청의 교육정책관으로 자리를 옮겨 관내 학교들의 공간 혁신 프로젝트인 '엉뚱공간 공모 사업'을 기획했다. 최근 교육부가 주력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학교 공간 혁신' 사업의 시작이었다.

◆학교 벗어나 광산구라는 '필드'로 = "학교에서 고3 담임을 오래 했다. 한데 학생들과 나누는 대화가 늘 성적 외에는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중학교로 갔다. 프로젝트 수업을 해보기로 하고, 답을 찾기 위해 방학 기간 동안 책을 100권은 읽었던 것 같다. 공정무역 수업을 하고 나니 학생들이 카페를 빌려 캠페인을 열겠다고 했다. 행사 진행을 돕기 위해 시민단체에도 문의하고, 이런저런 특강도 찾아다녔다. 그 자리에서 당시 민형배 광산구청장의 정책 참모를 만나게 됐고, 학교에서 진행하던 공간 혁신 프로젝트를 지역사회에 열고 싶다는 생각에 구청에 예산 지원을 요청했다.

민 구청장은 이 예산으로 지역 주민들과 상생할 수 있는 판을 짤 수 있겠냐고 물었다. 얼마 뒤 구청에서 교육정책관을 뽑는다는 공고가 떴고, 지원한 끝에 5급 사무관으로 구청에서 교육 정책을 수립하는 일을 맡게 됐다."

열의는 넘쳤지만, 교실이라는 '필드'가 사라지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 그에게 민 구청장은 "광산구라는 필드를 통으로 줬는데, 못할 게 뭐냐"고 격려했다. 먼저 기존의 지자체 교육 정책 점검부터 시작했다. 가장 흔했던 입시 설명회를 비롯해 교육청의 영역과 중첩되는 이벤트성 사업부터 중단했다. 지자체의 교육 정책은 달라야 했다. 광산구의 정체성을 고민했다.

광산구는 '자치'라는 화두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단순 거주민에 불과한 주민등록상의 '인구'를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시민'으로 탄생시키는 작업이었다. 정책 수행의 열쇳말은 '지역'과 '공간'이었다.

새로 지어진 청소년문화센터를 '야호센터'로 명명하고, 청소년복합문화공간 외에 마을 주민의 공동체 거점 역할을 하도록 설계했다. 이곳에서 학생과 교사, 마을시민, 지역예술가들이 함께 기획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당시 진행한 프로젝트 중 건축시민 콘텐츠를 관내 학교 공간을 혁신하는 '엉뚱공간' 사업으로 이어갔다. 학교의 유휴공간을 학생과 교사, 마을, 시민들이 바라는 삶의 모습으로 개선하는 작업이었다. 학교라는 공간이야말로 시민들이 만나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광주 광산구의 엉뚱공간 공모 사업에 참여한 광주 첨단고의 '아키놀이터'와 어룡초의 '배움놀이터'(위 사진). 학교의 낡고 오래된 공간이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광산구 제공


◆유휴 학교공간, 업그레이드 = 학교에 공모 사업을 낸 뒤 광산구의 교육력 제고 사업 예산을 이쪽으로 돌려 지원하기로 했다. 이 사업에 관내 초·중·고 9곳이 함께 했다. 시행 첫 해인 2016년에는 학교당 1000만원을, 다음 해에는 1500만원씩 지원했다. 예산만 놓고 보면 일반적인 실내 인테리어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지만, 사업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비어있던 교실이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상설미술관이자 '작당모의 쉼터'로 바뀌었고, 미니 콘서트장과 또래상담소, 마을카페가 됐다. 오래되고 낡은 가사실은 공유부엌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엉뚱공간 사업이 성공한 비결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대부분 이런 사업은 학생들에게 특별한 수업을 해주고 싶은 교사들이 자원하지만, 결국 교사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사업은 학생과 교사, 마을 주민이 첫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함께 했다.

광산구는 사업 참여 교사들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조언을 제공했다. 또한 철저하게 지역 공동체에 맡겼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시민들의 참여와 자치를 해치는 일체의 개입을 하지 않았다. 공모 사업에 선정된 학교와 맺는 협약식도 함께 지켜나가는 '약속'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구청장과 교사, 학생 대표가 각각 서명하게 했다. 학생들은 협약식 장면을 찍어 부모에게 보냈다. "구청이 예산을 이런 곳에 쓰는구나, 자연스럽게 정책 홍보가 됐다."

◆지자체 교육 정책이 중앙정부 정책으로 = 이 사업을 눈여겨본 광주시교육청이 2018년 '학생 중심 학교 공간 재구성_ 아지트' 사업으로 이어갔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타 지자체를 비롯한 91개 기관이 벤치마킹을 위해 광산구를 찾았다.

더 욕심이 났다. 공간 혁신 어젠다를 교육청까지 확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광주시 전체로 넓히고 싶었다. 이를 위해선 광주 시민의 공감대가 필요했다.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교육문화예술축제를 열기로 하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무작정 당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간사였던 유은혜 의원실을 찾았다.

"당시 학생자치에 관심은 많았지만, 뚜렷한 정책 모델을 찾기 어려웠던 유 의원이 광주의 야호센터와 엉뚱공간 사업에 주목했다. 이 일로 인연이 돼 국회에서 학교 공간 혁신 포럼도 열렸다. 유 의원이 교육부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학교 공간 혁신은 정부 정책이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2019년 1월부터 교육부로 자리를 옮겨 이 사업을 총괄하게 됐다. "현장의 작은, 그러나 급소를 건드린 시도가 정부를 움직인 것이다."

이처럼 지자체 교육 정책의 새로운 장르를 썼지만, 이러한 발상이 가능했던 것은 누구보다 학교라는 공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자체는 판을 만들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실행 경험과 기획력을 갖춘 최적의 전문가 그룹, 곧 '진짜 선수'를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선 '칸막이 행정'을 깰 수 있는 지자체의 개방적 마인드가 필수적이다.

"학교만 해도 굉장히 폐쇄적인 공간이다. 최근 미래학교를 준비하기 위해 에듀테크 기업과의 협업도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의 많은 것들이 학교로 들어가지 못한다. '순혈주의'를 깨야만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 당시 외부 전문가를 개방적으로 등용한 광산구의 정책 중 공간 혁신 외에도 노인복지, 마을복지 등 상당수 정책이 중앙정부의 정책으로 이어졌다. 동질 집단 안에서는 한계가 있다. 이질 집단의 교류에서 스파크가 나는 법이다. 작지만 파괴적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혁신이 지자체의 정책에도 필요한 시대다."

정애선 기자 as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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