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국 '미국의 안보 우려' 안 믿어 … 정보 실패로 인한 잠재적 피해 막대

영국 정부에 '화웨이의 5G 장비를 배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하면서 망신을 자초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의 기술굴기를 막기 위해 판돈을 2배 올리며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하지만 성공 가능성은 더 낮아 보인다는 지적이다.

1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글로벌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중국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공급을 위해 미국산 반도체 제조 장비를 이용할 경우 미 당국으로부터 라이선스(면허)를 받도록 추진중이다.

미 상무부는 이같은 내용의 규제를 담은 '해외 직접 생산 규정'(foreign direct product rule) 수정안을 만들었다. 이 규정은 미국산 군사용 또는 국가안보 관련 제품 기술에 대해 해외기업의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이번 규제가 현실화하면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램 리서치 등과 같은 미국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와 화웨이를 위해 반도체를 위탁생산하는 대만의 TSMC 등과 같은 기업이 대상에 오른다.
지난해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엑스포' 행사장에 걸린 중국 이동통신 기업 화웨이의 로고, 사진 AFP=연합뉴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응책은 여러 갈래다. 최근 뉴욕 연방검찰은 화웨이 임직원을 상대로 '부정부패조직범죄방지법'(RICO)을 위반했다며 추가 기소했다. 또 미국 기술이나 부품이 10% 이상 사용된 제품의 경우 화웨이와 중국 2위 이동통신업체 ZTE에 부품을 판매할 수 없도록 정책을 추진중이다.

제너럴일렉트릭(GE)과 프랑스 사프란이 공동으로 생산하는 민수용 항공기의 제트엔진을 중국에 수출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도 있다. GE와 사프란은 2014년부터 중국에 제트엔진을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경제학자이자 '아시아타임스' 홀딩스 이사인 데이비드 폴 골드만은 이 신문 기고에서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전방위 압박은 국가안보 측면에서 정당성이 없는 막무가내 경제전쟁으로, 예상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일례로 미 국가안보보좌관 로버트 오브라이언은 12일자 WSJ에 "미국은 화웨이 장비에서 은밀한 백도어를 발견했다"며 "이는 서구 국가의 통신을 염탐하는 장비"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화웨이는 미국에 "관련 정보를 공개하라"며 즉각 반박했다.

미국의 주장은 해외에서 비웃음을 자아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프랑스 최대 다국적 통신사인 '오렌지'의 CEO 스테파니 리처드는 지난 14일 "그런 증거를 볼 수 있다면 아주 흥미로울 것"이라며 "이라크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곳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미국의 거짓주장이 떠오른다"고 비꼬았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미국만 볼 수 있다는 백도어'(A backdoor that only the US can see)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 주장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에서 개최된 제56차 뮌헨안보회의에서 미 국방장관 마이크 에스퍼,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등 미국 측은 유럽 국가들에게 "화웨이를 배제하라"고 경고했다. 에스퍼 장관은 "중국의 5G 업체에 의존하게 되면 서방 동맹국의 중요한 시스템이 혼란과 조작, 스파이 등에 취약해진다"며 "통신과 정보공유 능력, 나아가 동맹 사이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유럽은 중국 5G에 대한 미국의 경고에 귀를 막았다"고 전했다.

막대한 잠재적 피해

미국 행정부의 신뢰성에 대한 타격이나 미국 주요 기업에 가해지는 리스크는 막대하다는 지적이다. 아시아타임스 골드만 이사는 "만약 미국이 GE-사프란 엔진을 장착해 민수용 항공기를 개발하려는 중국의 시도를 막는다면, 미중 무역전쟁은 완전히 다른 측면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프랑스 사프란사는 국가안보 자산으로, 사프란사를 규제하면 프랑스가 중국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비행기 생산량의 1/4를 중국에 판매하는 보잉사는 물론 미국의 반도체기업 등이 입을 잠재적 피해도 막대할 전망이다.

미국의 전방위 조치는 냉전 이후로 선례가 없는 것으로, 미국 정치권의 좌절감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이스라엘과 일본 호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맹국들은 '화웨이의 5G 네트워크 장비를 배제하라'는 미국의 강압에 맞서고 있다.

미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는 영국이 5G 네트워크 건설에 화웨이를 참여시킨 데 대해 공개적으로 보리스 존슨 총리에게 항의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개인적으로 존슨 총리에게 강력한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소용이 없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6일 "트럼프 대통령이 존슨 총리와의 통화에서 졸도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고 전했다. 존슨 총리는 14일 예정된 미국 백악관 방문을 연기했다.

독일의 집권 연립당 의원들도 화웨이의 5G 네트워크 참여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기각했다.

미 검찰의 부정부패조직범죄방지법 적용으로 화웨이 임직원들이 무거운 처벌을 받을 것은 분명하지만, 화웨이의 활동 자체를 좌절시킬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미국은 지난해 5월 자국 부품을 화웨이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화웨이가 5G 장비와 스마트폰을 출시해 판매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화웨이는 미국 대신 일본과 대만, 기타 국가의 부품 공급업체를 선택했다. 화웨이는 미국 부품을 쓰지 않고도 5G 장비와 스마트폰을 잇따라 제조하고 있다.

지난달 말 미국 국방부는 미국 부품이나 기술을 10% 이상 쓸 경우 화웨이와 ZTE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한 상무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달 4일 백악관 경제자문 래리 커들로도 WSJ에 "국방부의 반대를 지지한다"며 "미국의 위대한 기업들이 망하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은 12일 "국방부가 기존 입장을 바꿔 화웨이에 대한 부품 수출 통제 강화를 찬성하고 있다"고 전했다. 백악관의 강경 입장으로 입장을 바꿨다는 후문이다.

기업·과학자, 미국 떠난다

화웨이와 거래할 수 없다고 해서 미국 기업들이 망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업들은 미국을 떠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6일 "반도체용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표준을 만드는 비영리기구 '리스크 파이브'(RISC-V) 재단이 최근 델러웨어에서 스위스로 옮기기로 결정했다"며 "이유는 미국 정부의 규제 강화에 대해 소속 회원들이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NYT는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센터의 스캇 존스 연구원을 인용해 "만약 트럼프 행정부가 현재의 경로대로 계속 간다면, 많은 기업들과 많은 과학자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라며 "그들은 제품과 연구물을 다른 나라로 가져갈 것이고, 해당 국가들은 그에 따른 혜택을 입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퀄컴과 엔비디아를 비롯한 많은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전체 매출의 상당 몫을 아시아에서 벌어들인다. 만약 이들 기업이 중국에 상품을 팔 수 없다면 매출에 지대한 악영향을 받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화웨이는 '기린' 칩셋을 독자개발하며 퀄컴에 정면승부를 걸고 있다. 또 '어센드' 프로세서로 엔비디아와 경쟁하고 있다.

중국 측 분석에 따르면 화웨이는 미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사 칩셋 가격을 30% 낮추는 방안을 고려중이다. 아시아 시장에서 저가경쟁을 통해 미국 제품을 몰아내겠다는 심산. 그런 바람이 실현될 경우 엔비디아는 18개월 내, 퀄컴은 24개월 내 현금흐름이 끊길 것으로 전망된다. 엔비디아와 퀄컴의 연구개발 비용이 바닥난다는 의미다.

미 정부는 오는 28일 중국에 제트엔진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논의할 예정이다. GE를 필두로 한 미국 기업들은 그 조치를 강력 반대하고 있다. 정부가 주장하는 국가안보 위협이 불분명하다는 것. 미 정부 일각에서는 '중국이 미국-프랑스 엔진을 분해해 모방한 뒤 역설계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GE는 "중국이 2014년부터 제트엔진을 구매하고 있다"며 "중국이 새로운 엔진을 만들 이유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미국의 제트엔진 판매를 결국 막아선다면 중국은 보잉사가 아닌, 유럽의 에어버스로 구매처를 바꾸게 될 것이다. 이미 737맥스 항공기 프로그램 오류로 심각한 재정난에 처한 보잉사는 벼랑끝으로 내몰릴 수 있다.

정보전 실패가 재앙적 결과로

트럼프 행정부는 영국 정부를 압박해 화웨이를 배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영국이 결정을 내리기 전후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즉, 정보전의 실패로 심각한 국면을 맞게 됐다는 것.

화웨이와 영국의 관계는 고품질의 저렴한 이동통신 장비를 영국 기업에 파는 것 이상이라는 지적이다. 아시아타임스 골드만 이사에 따르면 화웨이는 2011년부터 영국 이동통신 구축 공학에 참여했다. 화웨이는 당시 영국 정보당국 관료인 존 서퍽을 보안총괄 사장으로 고용했다. 화웨이의 고위급 임원은 "영국과 화웨이의 관계는 서구 국가들 가운데 최고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영국 국가안보기구인 'GCHQ'는 수년 동안 화웨이의 코드를 면밀히 조사한 뒤 화웨이에 개선 조치를 요구했다. 화웨이는 그같은 주문에 즉각 대응하며 신뢰를 쌓아갔다.

화웨이는 2012년 영국에 13억파운드(약 2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혀 당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화웨이의 2018년 보고서에 따르면 화웨이는 영국의 연구개발에 1억1200만파운드를 투자했고 300명 이상의 연구개발자를 고용하고 있다. 또 영국의 대학, 연구기관 35곳과 협업하고 있다.

화웨이는 전체적으로 5만명의 외국인을 고용하고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연구개발자다. 또 전 세계 20여 곳에 자체 연구센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수천곳의 연구소를 지원하고 있다. 화웨이는 서구 과학엘리트들을 지원하고 있는 첫 번째 중국 기업으로, 이들의 도움을 받아 5G 기술과 관련해 선도적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골드만 이사는 "영국이 화웨이와 계속 협업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화웨이는 공개적으로 영국과의 관계를 구축했다. 전략적 투자와 영국 안보기관에 대한 계산된 존중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영국군은 1942년 일본이 싱가포르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며 "마찬가지로 미국 정보기관들은 중국이 게임의 룰을 바꾸는 기술을 들고 전 세계 시장을 요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또 워싱턴 정가는 중국이 고품질 칩을 자체 개발해 미국의 수출 규제를 비웃을 것으로 예상치 못했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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