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센터 라거펠트 연구원

"현재 자동화 이해하려면 당시의 논쟁에서 배워야"

미국 예일대 사회학 교수 데이비드 리스먼은 1960년대 초 '기계 자동화'(automation)의 미래를 탐구하면서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면 노동자들은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리스먼 교수는 1950년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을 공동저술한 이래 자동화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다. 고독한 군중은 미국인의 삶을 명쾌하게 정의한 명저였다. 그는 '미국인들이 자유시간을 알차게 보내려면 대중의 오락과 취미를 담당하는 연방정부 부처가 창설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향후 불황이 닥칠 경우 뉴딜 식의 공공산업진흥국 대신 '놀이산업진흥국'(Play Progress Administration)을 만들어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먼 교수뿐 아니었다. 당시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0년이 되면 기계들이 충분히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것이기에, 미국에 있는 모든 이들은 사실상 독립적으로 부유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도요타 CEO 도요타 아키오가 지난달 6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가전전시회'(CES)에서 자사가 만든 인공지능 로봇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뉴스


자동화 비관론자들도 낙관론자의 견해를 상당 부분 공유했다. '다가올 변화는 혁명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라고 봤다. 워싱턴국립대성당 주임사제였던 프랜시스 B. 세이어는 "자동화가 핵전쟁의 망령보다 더 걱정스럽다"며 "과학자들은 '사회를 움직이는 기계가 만들어진다면 신학자들이 어떤 종류의 사회를 원하는지 조언해줘야 한다'고 말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종교기관들이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 미디어학을 수립한 캐나다의 마샬 맥루한은 주임사제의 생각과는 달랐다. 그는 "에덴동산의 타락하지 않은 아담에게 창조물의 이름을 짓고 사색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처럼, 자동화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동화가 실행되도록 어떤 과정이나 생산물에 이름을 붙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1964년작 '미디어의 이해'에서 자동화 덕분에 "인간이 점차 자유로워지면서 예술적 자기 창조와 사회에 대한 창의적 참여가 가능해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당시 1차 자동화 논쟁을 보면 어설픈 측면이 많다. 하지만 우리 역시 2차 자동화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등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로 인한 혜택과 과제 등에 대해 곳곳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 공공정책 연구원으로 '윌슨쿼털리' 편집장을 지낸 스티브 라거펠트는 최근 격월간 시사잡지 '아메리칸 인터레스트' 기고에서 "20세기 중반 석학들이 자동화에 대해 왜, 어떻게 틀린 예측을 했는지 반문하는 게 중요하다"며 "그들의 실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 그들도 몰랐지만 어떤 부분을 맞혔는지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거펠트는 1차 자동화 논쟁에서 제일 먼저 얻을 교훈은 겸손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중반 사상가들은 너무 앞서갔다. 당시의 기술 수준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형편없었다. 현대 컴퓨터의 기원 '에니악'은 1946년 완성돼 1955년까지 구동됐다. 무게 30톤, 높이 5.5m, 길이 24.5m의 거대한 계산기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엔 고작 1만6000대의 컴퓨터가 있었다. 그들 중 최고라는 컴퓨터도 오늘날 600달러 노트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능이 낮았다.

오늘날 아마존의 음성비서 '알렉사'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의 변덕을 달랠 정도로 정교하다. 기업주들은 몇번의 클릭만으로 로봇 자동화 시설을 들여 화이트칼라 일자리를 없앨 수 있는 시대다. 또 1차 자동화 논쟁 이후 인류는 반세기 이상 심사숙고할 수 있는 경험치를 쌓기도 했다.

20세기 중반 자동화 논쟁은 경제의 호황과 불황을 뒤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호시절엔 자동화로 인한 풍족함의 문제를 걱정했다. 불황으로 실업률이 높아질 땐, 자동화로 인한 노동자 축출을 우려했다. 그 패턴은 바뀌지 않았다.

비관론자들이 먼저 공격에 나섰다. 1950년 MIT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노버트 위너가 '인간의 인간적 활용 : 사이버네틱스와 사회'라는 책을 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정보이론을 선도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로 명명한 의미를 대중화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는 "광전지 또는 온도조절장치 등과 같은 센서로부터 피드백을 공급받는 기계들은, 인간의 개입 없이 서로 의사소통하고 스스로 결함을 교정하게 된다"며 "이 기계들이 결국 인간들을 불필요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상상만이 아니었다. 이미 특정 제조업에선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고 있었다. 철강 압연과 통조림 제조업이 대표적이었다. 위너는 "자동화 기계로 노동자들이 대거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며 "현재의 불경기, 나아가 30년대 대공황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암울한 논조로 "기계는 육체노동과 화이트칼라 노동을 가리지 않는다"며 무차별적인 실업을 경고했다. 장차 노벨경제학상을 받게 되는 경제학자 허버트 사이먼도 1956년 "기계는 향후 20년 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해낼 것"이라고 예언했다.

학자들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자동화에 깊은 고민을 보탰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스테이거왈드에 따르면 미국 자동차노동조합(UAW) 위원장 월터 루서 등 노조 대표들은 자동화를 '저주'라기보다 '축복'에 가깝다고 봤다. 사람 노동자가 하기 싫은 더럽고 지루한 일을 자동화 기계가 대체할 수 있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노조들은 자동화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기술을 향상시키고 기계를 감독하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될 것이었다. 아니면 화이트칼라 일자리로 승진하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미국 노동 총연맹 산업별 조합회의'(AFL-CIO)는 당시 '주당 30시간 일하고 40시간에 해당하는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였다. 하지만 루서는 그런 구상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국인이 여가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보지 않았다.

자동화에 대한 여론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확장주의자 또는 팽창주의자들은 실업을 수요 감소의 산물로 봤다. 구조주의자들은 실업의 주요 원인을 자동화로 지목했다. 루서는 정확히 중도 입장이었다. 하지만 제조업 일자리가 계속 줄어들면서 그는 구조주의 입장으로 선회했다.

루서는 연방정부가 직업훈련을 포함한 새로운 정책, 고통 받는 공통체를 위한 맞춤형 지원책을 꺼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제안 중 일부는 1964년 린든 존슨 대통령이 제시한 '위대한 사회' 정책에 포함됐다.

산업용 로봇은 이 즈음에 처음 등장했다.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기계들이었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데는 실패했다. 1961년 첫 번째 산업용 로봇인 '유니메이트'(Unimate)가 뉴저지주 트렌턴시 인근 제너럴모터스(GM) 공장에 등장했다. 그 흔한 환영식도 없었다. 유니메이트는 공장에서 금형 주물공 역할을 맡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자동차 문짝을 조립라인에서 들어내 냉각수에 집어넣는 일을 맡았다. 노동자들은 그처럼 고된 일을 기계에 떠넘긴 데 대해 기뻐했다.

수년이 흘러 유니메이트는 캔을 따 맥주를 컵에 따르는 일을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자니 카슨이 진행하는 '투나잇쇼'를 통해 미국 전역에 방송됐고,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그때가 유니메이트의 절정이었다. 당시 노동자가 넘쳤다. 제조업체들은 비싼 데다 증명이 안된 자동화 기술을 채택하길 꺼렸다. 미국 로봇산업의 활력은 사그라들었다. 그 모멘텀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현재 미국은 전 세계 노동자 1000명당 로봇 비율에서 7위에 그치고 있다.

"자동화, 호황엔 '풍족' 불황엔 '실업' 걱정 끼쳐" 로 이어집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