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연 지음 / 라이킷 / 1만3000원

라디오 생방송 스튜디오 안에 설치된 시계에는 세 종류의 시간이 표시된다고 한다. 현재 시각, 프로그램이 시작된 후 지금까지 흐른 시간, 프로그램 종료까지 남은 시간. 13년째 라디오피디를 하고 있는 저자는 3종류의 시각이 마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바로 지금, 지금껏 살아온 시간, 죽음까지 남은 시간.

“매일 반복되는 삶의 권태를 이겨내기 위해선 언젠가 올 마지막을 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일상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라짐들, 사소한 마지막들을 보며 나의 죽음을 인식하는 힘. 그것이 시계를 보는 마음이다.”

마침내 라디오 프로그램 종료. 어김없이 0이 되고야 마는 초록색 시계를 보며 저자는 자신의 마지막을 상상한다. 무엇인가에 골몰하면 그 자체가 강렬한 은유처럼 보인다. 사랑에 집중하고 있다면 사랑의 시작과 쇠락이 인생처럼 보이고 곁으로 스쳐가는 온갖 풍경이 사랑과 연결돼 보이듯, 라디오에 집중하니 라디오 자체가 삶과 닮아 보인다.

“종로나 시청 같은 강북 구도심. 건너편에 새 아파트가 우뚝우뚝 올라가는 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옛날 동네. 후암동 망원동 옥수동 이태원 말고 해방촌. 판교 말고 과천. 사람으로 치면 대략 50대 언저리. 체력도, 외모도, 감각도 점점 기울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나이.”

13년차 라디오 피디인 저자가 바라보는 라디오의 현 모습이다. 전성기를 향해 달려갔다가 어느 덧 그 시기를 지나 조금 처지는 게 자연스러워진 누군가를 바라보듯 저자는 라디오와 자신의 삶을 관조한다. 과거의 화양연화를 남몰래 쓰다듬으며 쓸쓸해 하기도 하지만, 다시 올 전성기를 슬며시 기다리기는 모습이 인간과 닮았다.

13년차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슬기로운 직장생활 노하우'도 눈에 띈다. 라디오방송은 매일 해야 한다는 게 가장 힘들지만 그게 오히려 가장 큰 위로를 준다고 한다. 방송을 망친 어느 날인가는 ‘매일 하는 것을 어떻게 매일 잘하니’ 하며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차피 직장인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말로 그렇게 설득되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장면에선 직장인이지만 직장인의 마음으로 회사를 다녀서는 안 되는 라디오피디의 숙명 또한 느껴진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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