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0여건 법안심사 없이 계류 … 전체회의조차 못 올리는 법안도 수두룩

"이익단체 청부입법도 많아" … 폐기된 법안, 새 국회서 재활용하기도

'부실입법 남발'에 국회 지원기관 허덕 … '양'보다 '질'중심 평가해야

'일하는 국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법안 남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발의 법안 수에 열중하는 의원들이 많아졌다.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법안을 제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부 법안은 이익단체들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폐기 위기에 놓인 1만4000여건의 법률안에는 '일하지 않는 경우'와 함께 '입법권 남용'의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실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18일 기준으로 20대 국회에서 발의한 법안은 2만4055건이며 이중 소위에 회부된 것은 1만9733건, 소위에 상정까지 된 것은 1만1697건이었다. 8036건은 상임위 전체회의에서 소위로 회부했지만 심사를 위한 상정조차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한자리에 모인 우수 국회의원 | 문희상 국회의장이 지난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2019년도 입법 및 정책개발 우수 국회의원 시상식'에서 수상자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안정원 기자


같은 기간 폐기를 기다리고 있는 계류법안은 1만5012건이다. 이중 법안소위에서 전혀 논의조차 되지 못한 게 53.5%에 달하는 셈이다. 심사 한번 하지 않고 폐기되는 게 현재 계류돼 있는 법안 중 절반이 넘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전체 제출법안 중에서 따져보면 33.4%에 달하는 규모다. 상임위에 상정되지 않고 계류돼 있는 법안까지 포함하면 '단 한번의 심사'도 거치지 않고 쓰레기로 전락하는 법안은 더욱 많아진다.

이같이 심사도 안 된 채 폐기되는 것은 법안심사소위가 제대로 열리지 않은 탓이 크다. 법안심사 소위를 한 달에 두 번 열도록 명시한 국회법을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평균 두 달에 한 번꼴로 여는 법안소위에서 처리한 법안이 제한돼 있는 만큼 법안소위에 상정할 법안을 사전에 정리할 수밖에 없다는 게 국회 사무처와 의원실 등의 설명이다. 여기에는 '건수'를 올리기 위해 남발한 법안들이 대거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사했지만 폐기예정 법안도 7000건 = 법안소위 심사 단계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했으나 폐기된 법안이 6976건이다. 국회 사무처 핵심관계자는 "계류된 법안은 심사를 못한 게 아니라 통과시킬 수 없는 법안이기 때문에 심사한 이후에 계류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 의원실 관계자는 "이익단체들이 법률안을 내달라고 해서 제출한 경우가 있는데 이런 법률안은 통과될 가능성이 적고 의원도 그렇게 강하게 밀어붙이기 어려워 계류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익단체에서 요구한 법안의 경우엔 폐기되는 것보다 계류돼 있는 게 좋다"고 했다. '사실상 폐기' 수준이지만 '계류' 상태로 유지시켜 이익단체와의 긴장관계를 이어가려고 한다는 주장이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거나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법안 역시 '폐기'보다는 '계류'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의원들 역시 자신들의 부실법안이 폐기조치됐다는 '불명예'를 달기 싫어하기 때문에 '계류'상태로 남겨놓길 원한다는 얘기다.

국회 사무처 핵심관계자는 "의원들이 법안을 너무 쉽게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면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검토하거나 공청회 등을 충분히 거치지 않고 제출한 사례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매 국회마다 대규모로 폐기된 법안이 새로운 국회에 재활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도 했다. 국회의장 직속 혁신자문위는 국회의원들의 발의건수가 빠르게 증가해 법제실 등 입법 지원 인력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지목해 '문구 조정' 등 건수만 늘리는 발의는 상임위원장실에서 일괄적으로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달라진 우수법안 평가 = 의원 법률안의 질적 수준을 평가해 시상, 법안발의의 '양적 확대'보다는 '질적 제고'를 유도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지고 있다. '많은 법'보다는 '똘똘한 법 하나'를 잘 만들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지난 22일 '2019년도 입법 및 정책개발 우수 국회의원'시상식에서 '올해 최우수 의원'으로 뽑힌 김영호·김해영 의원(정치행정부문), 박명재·윤관석 의원(이상 경제산업부문), 권미혁·박광온 의원(이상 사회문화부문) 등 6명의 의원에게 상패를 수여했다. 또 강훈식 의원 등 36명은 우수의원으로 선정됐다. 최우수·우수 국회의원은 대학교수 변호사 등 외부 전문가 18인으로 구성된 '우수 입법선정위원회'가 법률 제·개정을 위한 의견수렴 과정, 법률안 자체의 헌법 합치성 및 법체계 적합성, 법률 시행을 통한 정책효과 및 집행비용 등 다양한 측면을 종합적으로 심사했다. 문 의장은 "우수 국회의원 선정과 관련된 모든 심사를 정성평가로 진행하는 등 질적인 발전도 도모하고 있다"며 "오늘 시상되는 우수법안은 입법 과정에서 지향해야 할 하나의 이정표"라고 말했다.

["21대 국회 이것만은 바꾸자"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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