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상 / 만권당 / 3만2000원

한일 양국 간에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독도 문제는 학문적인 진실에 바탕을 둔 논리적인 대응보다 감정적인 대결로 치닫고 있다. 영토 논쟁의 차원을 넘어 상대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으로까지 악용되기도 한다. 학계 연구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한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이 책은 국익을 떠나 독도 문제를 역사지리적·국제법적인 진실을 규명하는 학문적 연구의 문제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구체적 근거를 들어 영유권의 진실을 밝힌다. 독자는 독도가 우리 영토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증거들을 만날 수 있다.

독도 태종실록에서부터 우리땅으로 기록

동해에 울릉도 이외에 다른 섬이 있다는 것은 태종실록에서부터 기록됐다. 하지만 보다 분명한 지리적 지식과 영유권 인식이 기록된 것은 숙종실록이다. 숙종 때 안용복을 비롯한 조선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와 충돌한 사건은 외교분쟁으로 이어졌다.

오랜 외교 교섭 끝에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는 조선 땅인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런 인식은 동국문헌비고(1770년) 만기요람(1808년)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됐다. 특히 저자는 숙종실록에 기록된 독도 인식이 정확했다는 것을 원록각서 등 일본의 고문헌과 연계해 비교함으로써 구체적으로 규명했다.

이들 자료도 중요하지만 일본의 '태정관지령'만큼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자료도 없다. 메이지정부 초기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의 문서에서 독도가 한국 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 내용을 관보 격인 태정류전에 공시했다. 태정관지령은 은폐되어오다 1987년 일본 교토대학 호리 가즈오 교수가 발표한 논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대한제국도 안용복 사건 이후 독도가 '옛날 우산국 땅으로서 조선 땅'이라는 인식을 변함없이 유지했다.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로 석도, 즉 독도를 울릉도 관할로 공포했다.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인식은 일본에서도 19세기 말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일본 해군성은 환영수로지(1886년 12월) 조선수로지(1894년 11월) 조선수로지 제2판(1899년 2월) 등에서 독도를 조선동안편에 '리앙쿠르열암'이라는 이름으로 수록했다. 이는 19세기 말까지 독도의 영유권이 조선에 있는 것으로 분명하게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일본이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동해에서 '양코'라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새로운 섬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양코 발견설은 1901년 3월 흑룡회 기관지 회보에서부터 시작돼 언론에도 보도됐다. 지학 전문지 지학잡지(1901년 5월)가 양코 발견설이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밝히자 '미발견의 섬'이라는 주장만 삭제하고 다시 흑룡회의 새로운 기관지 흑룡(1901년 6월)에 이 섬에 대한 내용을 게재했다. 이런 왜곡된 내용은 한해통어지침(1903년 1월)과 최신한국실업지침(1904년 7월)으로 이어졌다.

탈취 목적으로 왜곡한 일본의 독도 인식

탈취를 목적으로 한 왜곡된 일본의 독도 인식은 1905년 목적을 달성한 이후 점차 원래대로 바로잡아졌다. 최신한국실업지침이 독도 무주지설을 유포하기 위한 왜곡된 기록의 완성판이라면 1920년 일본수로지는 그 후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은 올바른 기록의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도를 둘러싼 양국의 분쟁은 해방 이후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다. 포츠담선언과 이를 집행하기 위한 연합국최고사령부의 지령에 의해, 미군정 관할 하에 있던 독도는 1948년 8월 정부수립 당시 그대로 대한민국에 인계됐다. 이는 독도의 반환 절차가 종결된 것을 의미한다. 1951년 6월 주한미군이 장 면 총리에게 독도 폭격훈련장 사용신청을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을 독립시키기 위한 대일평화조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독도 문제는 다시 이슈화된다. 독도에 관한 지리·역사적 사실이 일본 외무성에 의해 다시 왜곡되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기록만 가지고 보면 공식적 왜곡의 출발점은 1947년 6월 외무성 발간 소책자 '일본의 부속 소도 Ⅳ: 태평양 소도서, 일본해 소도서'다. "독도에는 한국명이 없다" "한국의 지도에 독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울릉도에서의 거리는 명시하지 않고 "독도는 오키도로부터 86해리 떨어져 있다"는 등의 왜곡된 내용이 소책자에 실려 연합국최고사령부와 미 국무성에 배부됐다.

우여곡절 끝에 대일평화조약은 체결됐다. 하지만 분쟁의 불씨를 간직한 채 모호하게 체결돼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일본 고문헌들도 독도 실체 증언

저자는 책에서 각종 1차 사료들과 문헌 지도 독도와 관련된 문건 조약 규정 등을 들어 독도가 한국 땅임을 학문적으로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일본 고문헌에 등장하는 독도 관련 문구들을 인용해 세심하게 번역하고 해설을 덧붙여 일본의 주장이 허구임을 규명한다.

또 독도는 조선 영토라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는 해군해도 제95호 '일본 혼슈·규슈·시코쿠 부조선'(1891) 지도와 해군해도 제21호 '조선전안'(1896) 지도·독도를 한국영역으로 표기해 샌프란시스코조약 비준과정에서 일본정부가 조약의 부속지도로 국회에 제출(1951년 10월)한 '일본영역참고도' 마찬가지로 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제외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일본영역도' 등 다양한 지도의 모사본을 제공해 시각적으로 독도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한편 저자는 책에 첨부한 '독도 관련 조약·지령·서한'을 부록에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실어 내용을 쉽게 대조해 볼 수 있게 했다. 또 카이로선언(1943년 11월 27일 서명, 12월 1일 발표) 포츠담선언(1945년 7월 26일), 일본의 항복문서(1945년 9월 2일)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와 제1033호, 러스크 비밀서한(1951년 8월 10일),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에서의 덜레스의 연설(1951년 9월 5일),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의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의 연설(1951년 9월 7일), 덜레스 전문, 대일평화조약 등은 독도 문제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와 독도 영유권 귀속을 판단하는 근거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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