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케이아시아 "칩 소형화 한계상황, 후발주자가 경쟁력 가질 여지"

만 73세 사카모토 유키오는 일본 반도체 베테랑이다. 그는 지난해 가을 칭화유니(쯔광)그룹의 수석부사장을 맡았다. 칭화유니그룹은 중국 최고의 명문대로 꼽히는 칭화대가 과학기술 연구성과 상용화를 위해 1988년 설립한 첫 산학연계 기업이다. 사카모토의 역할은 D램칩 사업의 출범을 관장하는 것이다.

아주 대담한 결정이었다. 일각에선 애초 구상부터 잘못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었다. 미중 기술전쟁이 점차 격화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 기술기업 화웨이와 SMIC 등에 연달아 펀치를 날리고 있다. 중국에서 새로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다는 구상은 현실적으로 매우 벅차 보였다. 하지만 사카모토는 낙관적이다.

그는 닛케이아시아 최신호와의 인터뷰에서 "후발주자들이 시장 선도기업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며 "오늘날 반도체 기술 발전 속도는 둔화되고 있다. 트랜지스터 소형화가 물리학과 광학 측면에서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건 새로운 메모리칩 공장을 짓는 단기간 조건이 아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때를 잘못 잡아도 아주 잘못 잡았다. 칭화유니그룹이 미국 정부의 제재 타깃에 오르지는 않았다 해도, 중국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언제 미국의 칩제조 장비와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다시 수입할 수 있게 될지 매우 불확실하다.

사카모토 부사장은 장기 전망을 낙관하고 있다. 중국이 자체적으로 실리콘 웨이퍼 제조기술을 개발하고 칩 제조 재료와 장비, 소프트웨어를 공급할 기술적 능력을 독자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 패러다임 전환으로 신흥기업들이 큰 기회를 잡은 역사적 사례가 많다. 사카모토 부사장은 오늘날 반도체 부문에서 그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3차원 기술의 등장

'무어의 법칙'은 교과서에 존재한다. 집적회로 칩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 숫자가 18~24개월마다 2배 늘어난다는 내용이다. 인텔 공동창업자 고든 무어가 1960년대 예견했다. 반도체 업계는 2000년대 중반까지 실리콘 웨이퍼 다이(die)에 탑재되는 트랜지스터와 회로의 크기를 줄이면서 무어의 법칙을 증명했다.

하지만 약 15년 전 한계에 부닥쳤다. 트랜지스터 크기는 약 30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로 줄었다. '게이트'(gate)로 불리는 중앙전극의 폭으로 크기를 잰다. 이후 소형화의 속도는 둔화됐다.

그럼에도 반도체 제조사들은 최신형 칩에 붙는 숫자를 계속 줄였다. 32나노미터에서 22나노미터로, 다시 14나노미터에서 10나노미터로 작아졌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붙은 숫자들은 실제 트랜지스터 게이트의 실제 크기를 반영하지 못한다. 브랜드에 붙는 이름이 변했다는 게 정확하다.

도쿄대 히라모토 토시로 교수에 따르면 대만 TSMC가 지난해 내놓은 7나노미터 로직칩에 들어간 트랜지스터의 실제 게이트 크기는 약 18나노미터다. 이는 32나노미터 칩 개발 당시와 대비된다. 32나노미터 칩에 들어간 게이트의 길이는 정확히 32나노미터거나 그보다 적었다.

소형화에 어려움이 커지고 개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칩 제조사들은 이른바 3차원 기술에 눈을 돌리고 있다. 전통적인 웨이퍼 표면 위 공간을 활용해 하나의 칩에 보다 많은 트랜지스터를 탑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과 개인용 컴퓨터의 데이터·이미지 저장에 쓰이는 최신형 낸드플래시 메모리칩은 기반이 되는 웨이퍼 다이 위에 96층에서 128층의 집적회로를 겹쳐 쌓아 만든다.

겹쳐 쌓는 층이 많아 전체 칩이 두꺼워지면서, 플래시 메모리 세계에선 트랜지스터 소형화가 퇴보하는 흐름이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현재 플래시 메모리칩의 전형적인 트랜지스터 크기는 22~32나노미터다. 수년 전 플래시 메모리칩에 사용됐던 14나노미터 트랜지스터보다 더 크다.

소형화에서 3차원 기술로 중요도가 전환되면서, 칩제조 프로세스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에도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반도체 웨이퍼 위에 집적회로와 부품, 박막회로, 프린트배선 패턴 등을 만들어 넣는 '포토리소그래피' 기법이다. 웨이퍼 위에 감광성질이 있는 포토레지스트를 얇게 바른 후, 원하는 마스크 패턴을 올려놓고 빛을 가해 사진을 찍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회로를 형성한다.

회로가 계속 미세화되면 더 좋은 해상도를 얻기 위해 짧은 단파의 빛이 필요하다. 가장 발전된 칩 소형화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극자외선의 빛(EUV)이 필요하다.

EUV에서의 해방

EUV 리소그래피 기술은 구현하기가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든다. 네덜란드 기업 ASML 한 곳만 빼고 모두 이 기술을 버렸다. 독점기업이 된 ASML은 장비 1대당 1억2000만~1억7000만달러에 판매한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칩제조사가 ASML 장비 1대를 구매한다고 해도 이를 전체 칩제조 과정의 극히 일부분에만 적용할 수 있다. 장비 1대로는 소형화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

현재 EUV 장비는 로직칩 제조에만 사용된다. PC의 마이크로프로세서나 스마트폰의 시스템온칩(SoC), 인공지능의 데이터 고속처리 등과 같은 데 쓰인다. 로직칩은 회로 구성이 복잡하기 때문에 그동안 3차원 적층 기술을 완전히 구현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플래시 메모리칩 제조사들은 사실상 EUV를 외면하고 있다. 칭화유니그룹의 사카모토 부사장은 "내가 볼 땐 D램 메모리는 EUV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와 대만 UMC, 일본 엘피다 메모리 등 다양한 기업에서 D램 사업을 관장한 바 있다.

칩제조 공장이 EUV 리소그래피를 활용하기 시작한다면, 다른 많은 프로세스 역시 EUV 리소그래피에 최적화되기 위해 재설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최첨단 장비를 구매하기 위해선 엄청난 자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장비가 첨단화할수록 장비 공급업체 숫자는 크게 줄어든다. 결국 미국의 대 중국 기술제재 효과는 극대화된다. 반면 반도체 제조사가 EUV 리소그래피를 건너뛴다면, 칩제조 장비의 선택 폭은 커진다.

비(非) EUV 리소그래피를 위한 많은 선택지가 있다. 일본 니콘과 캐논은 비 EUV 리소그래피 장비를 만든다. 현재까지 미국은 이들 기업이 중국 반도체 제조사에 장비를 판매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기업들은 자체적인 리소그래피 장비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이 '심자외선(DUV) 불화아르곤 엑시머 레이저 담금 기술'을 사용하는 리소그래피 장비 시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는 비 EUV 리소그래피 기술 중 가장 선진화된 것이다.

한편 칭화유니그룹 계열사인 양쯔메모리는 올해 6월 128단 3D 플래시 메모리칩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며 올해 중 제품 양산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중국의 선진 반도체 기술 확보를 막기 위한 미국의 초점은 EUV에 집중된 상황이다. 미국은 네덜란드 정부를 설득해 ASML이 중국 SMIC에 EUV 장비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양쯔메모리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은 3차원 반도체칩 제조와 관련한 기술적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 결국 언젠가는 최첨단 로직칩에도 3차원 기술이 적용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EUV 기반 칩 소형화에 사활을 걸 필요가 없어진다.

물론 칩제조의 복잡한 과정에 쓰이는 대부분의 비(非) 리소그래피 장비는 미국과 일본 기업이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한다는 엄혹한 현실이 있다. 멀티레이어 3D 칩제조에 필수적인 박막층 증착 과정은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가 장악하고 있다. 또 미국 KLA텐코의 웨이퍼 표면 검사기는 각 레이어를 완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장비다.

3D 기술 여부와 상관없이, 만약 미국 장비에 대한 접근이 봉쇄된다면 그 어떤 칩제조사도 제조능력을 확보하거나 확대하는 건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중국이 재료와 광학, 화학, 웨이퍼 제조과정 통제, 표면 검사, 기능 테스트 등 반도체 모든 영역에서 제조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일본 지사 대표와 캐논 최고기술경영자를 지낸 이코마 도시아키는 2000년대 중반 중국 SMIC의 최고기술경영자였다. 그는 닛케이아시아에 "중국에서의 경험에 비춰볼 때 중국은 충분한 숫자의 유능한 과학자와 공학자를 갖고 있다. 자체적으로 칩 제조 장비와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지난 수십년 간 자국의 많은 학생들을 미국 대학과 기업에 보내 경험과 노하우를 쌓게 한 뒤 바다거북처럼 다시 고향으로 귀환시키는 국가적 전략을 실행했다. 이제 그 결실을 맺을 때"라고 덧붙였다.

도쿄대 과학 교수인 와카바야시 히데키는 "칩 제조 장비와 재료의 전체 공급망을 자체 구축하는 건 단시간 내 이뤄질 수 없다"며 "하지만 중국은 10~20년 내 반도체 분야의 선도국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과학과 공학 전분야에 걸친 풍부한 인재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술적 트렌트는 중국과 같은 후발주자에겐 순풍이 되고 있다. IT 리서치 기업인 가트너의 새뮤얼 왕 리서치 부사장은 "새로운 재료, 3D, 첨단 패키징, AI 지원 칩 디자인, 클라우드 기반 공동 제조 등 신기술은 신흥 주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제임스 루이스 부소장은 미국이 중국에 인공위성 부품을 수출 금지하자 미국 이외 국적의 기업들이 대안 공급자가 됐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지난 5월 자신의 블로그에 중국의 반도체 기술 접근을 막으려는 미국 정부의 조치를 겨냥해 "과도하게 광범위한 제한조치는 중국보다 미국의 이익을 해치게 된다"고 경고했다.

사카모토 부사장은 올해 초 한 중국 기업인과 나눈 이야기에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 기업인은 사카모토에 "중국 기술 선도기업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고마워한다. 자체 기술을 반드시 개발해야 한다는 투지를 갖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진핑 주석은 '2025년 반도체 수요의 70%를 자체적으로 공급하겠다'는 바람을 피력한 바 있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은 반도체 수요의 16%를 자체적으로 공급했다.

닛케이아시아는 "미국의 기술 압박은 2025년으로 설정된 시 주석의 꿈을 무너뜨릴지 모른다"며 "하지만 미국의 각종 제한조치는 시진핑 주석의 꿈이 현실화할 장기적 확률을 높였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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