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손해액 일일이 계산한 재판부 눈길 … 패소한 한미약품 "즉각 항소"

한미약품의 늑장공시로 피해를 입은 투자자 손실액을 배상해야 한다는 첫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손실액을 꼼꼼히 계산해 눈길을 끌고 있다.

공시지연에 따른 기업 책임을 법리적으로 판단하는 것 외에 투자자 손실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실제 피해자들에게 피해회복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들였다는 평가다. 특히 늑장공시로 인한 주주 배상의 첫 사례인 만큼 유사 분쟁에서 기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16부(임기환 부장판사)는 최 모씨 등 주식투자자 126명이 한미약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최씨 등에게 최소 14만원에서 최대 1억1000만원을 한미약품이 지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관련 소송은 서울중앙지법 다른 재판부에 2건이 심리중이다.

이 소송에는 240명이 30억원 가량을 청구한 상태인데 이번 판결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패소한 한미약품은 즉각 항소하겠다는 입장이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공시 지연과 관련해 당시 검찰 조사에서도 무혐의로 결론이 난 사안"이라며 "공시 규정을 위반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 판결이 나온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당시 공시 규정은 공시를 할 사안이 발생하면 24시간 이내 공시를 하게끔 되어 있어 규정 위반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루새 주가 18% 급락 = 한미약품은 2016년 9월 29일 장 마감 후 미국 제네텍에 1조원 상당의 표적 항암제 기술을 이전하는 계약을 체결한다고 공시했다.

하지만 다음날인 30일에는 독일 베링거인겔하임과 폐암 치료제 '올무티닙'의 8500억원 규모 기술이전 계약이 종료됐다는 내용을 공시했다. 호재성 공시 이후 악재성 공시가 터지자 30일 오전 5% 가량 올랐던 한미약품 주가는 18% 급락하며 장을 마감했다.

제네텍과의 계약 체결이후 증권사들은 앞 다퉈 한미약품의 목표 주가를 올렸다. A증권 등은 한미약품 목표 주가를 110만원에서 122만원으로, 일부 언론은 한미약품에 대해 '황제주'라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제네텍과의 계약 소식을 알린 9월 29일 한미약품 주식 종가는 62만원이었고, 다음날인 30일 주식시장이 열리자 65만4000원까지 올랐다.

하지만 베링거인겔하임과 계약 종료라는 악재성 공시로 이날 종가는 50만8000원을 기록했다.

한미약품 지주회사인 한미사이언스 역시 29일 종가는 14만2500원이었으나 30일 종가는 11만4000원이었다.

호재성 공시는 29일 주식시장이 끝난 후, 악재성 공시는 30일 주식시장이 개장하고 29분이 지나서야 공시했다. 투자자들은 "한미약품 등은 기술이전계약 변경을 이전에 알고 있었으므로 늦어도 (호재공시를 한 다음날인) 30일 주식시장이 개장되기 이전에 악재를 공시했어야 한다"며 "공시의무 미이행은 신의칙상 투자자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은 위법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소송을 제기하면서 "증권시장에서 기업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내용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신속하게 공개돼야 한다"며 "한미약품은 계약 체결이라는 호재와 해지라는 악재를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호재성 정보는 2016년 9월 29일 주식시장이 끝난 후 공시하고, 악재성 정보는 30일 주식시장이 개장하고 나서야 공시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한미약품이) 호재성 정보를 보고 일반 투자자들이 주식 매수를 뻔히 알면서도, 주식 시장이 열리기 전 악재성 정보를 공시하라는 거래소 독촉을 수차례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투자자 손해는 상실주가 = 한미약품측은 "기술이전계약을 해지한다는 의사표시가 도달한 것은 29일 오후 7시 6분"이라며 "계약 해지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29일 오후 7시 6분에야 악재에 대한 공시 의무가 발생했다"고 맞섰다. 하지만 재판부는 투자자들 주장이 일리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한미약품 임직원들은 호재 공시전에 이미 계약해지 사정을 알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며 "아무리 늦어도 이 사건의 호재 공시 전에는 악재를 공시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기업공시제도 취지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이어 "한미약품의 행위는 투자자들이 호재에 따라 높게 형성된 주식을 매수했다가 악재공시로 주가가 하락하면서 입게 된 손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한미약품 주장처럼 거래소 측과 문제로 거래개시 후 공시된 것이라고 하는데, 불가능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재판부가 늑장공시에 대해 한미약품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구체적인 손해액 산정은 쉽지 않다. 주주들이 주식을 사들인 시점과 가격이 천차만별인데다가 중간에 매도한 사람이 있는 반면 현재까지 보유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공시의무 불이행으로 인해 손해를 입게 된 주식투자자가 입은 손해액은 공시의무 위반으로 인해 상실한 주가상당액"이라며 "주주들의 매수가액에서 실제 매도가액을 공제한 금액이 손해액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소송을 제기한 주식투자자들도 30일 종가를 기준으로 손해배상액 산정을 요구했고 재판부도 주식투자자들이 주식을 매수한 가격에서 주가가 하락한 9월 30일 종가를 제외한 금액을 손해액으로 정했다. 재판부는 126명의 원고를 27개 유형으로 나눠 유형별로 손해액을 직접 산정해 판결문에 담았다.

예를 들어 A씨는 악재공시전 주당 64만9000원에 5주, 주당 65만원에 10주, 주당 63만원에 5주, 주당 62만원에 3주 등 23주를 1475만5000원에 매수했다. 재판부는 30일 종가 50만8000원을 기준으로 한 23주(1168만4000원)를 제외한 307만1000원을 A씨의 손실액으로 봤다. 다만 이를 초과하는 손해배상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이날 승소한 주식투자자들은 최소 14만원에서 최대 1억1000만원의 손해를 배상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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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약품 의도적 공시지연 배상해야”

오승완 기자 osw@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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