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희롱을 사실로 판단한 국가인권위 조사 결과에 정치권이 법석이다. 이해는 된다. 여당 입장에서는 고인의 성추행 의혹 당시 헛발질을 했으니 이제라도 최대한 만회해보고 싶을 것이다. 야당은 어떤가. 젠더 이슈가 힘을 얻는 흐름 속에서 여권인사들의 성추행 사건이 부각되는 것이 재보궐선거를 앞둔 이 때 얼마나 호재일지 안봐도 훤하다.

정치권 스피커 덕분에 조사 결과가 널리 알려져 이제라도 피해자가 그동안의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득이 있는 이슈에만 정치권이 목소리 내는 걸 보면 화가 난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정치권이지만 홍수가 날 지경인데도 제대로 노를 젓지 않는 이슈는 바로 아동인권 문제다. ‘정인이 사건’에 좀 나서지 않았느냐고 하겠지만 정치권은 이때 엉뚱한 방향으로 노를 저으며 무지를 드러냈다. 무리한 대책을 순식간에 쏟아내더니 며칠 안에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겠다는 식으로 나와 전문가들이 “제발 진정하시고 이런 식의 입법은 멈춰주세요”라고 말려야했을 정도다.

박 시장 조사결과를 내놓기 직전 인권위는 아동인권 관련한 성명을 냈다. 최영애 인권위원장 명의의 성명서를 한줄로 요약하면 “출생통보제 법제화를 간곡히 요청합니다”였다. 간곡한 당부에도 이날의 성명은 조용히 묻혔다.

아동이 태어났을 때 분만에 관여한 의사·조산사 등에게 의무적으로 출생 사실을 국가기관에 통보할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의 출생통보제를 법제화하라는 인권위 권고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7년, 2019년에도 간절히 요청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도 2019년에 권고했다. 국회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아이들이 소리 없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8일에는 출생등록도 안 된 채 8년의 짧은 삶을 산 아동이 친모에 의해 사망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역시 출생등록 되지 않은 생후 2개월 아기가 숨진 상태로 냉장고에서 발견됐다.

아동들은 투표권이 없다. 집단을 이루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지도 못한다. 정치권력이 자신들에게 정치적 이득이 있어 보이는 사건에만 ‘선택적’으로 호들갑을 떠는 현실이 계속되면 아동인권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출생통보제는 태어났다는 사실 한줄조차 기록되지 못한 채 가장 가까운 자에게 죽어간 아동들에게 국가와 정치권이 꼭 갚아야 하는 빚이다. 이제는 갚을 때가 됐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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