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케이아시아


1978년 중국 최고지도자에 오른 덩샤오핑은 일본 마쓰시다전기(현 파나소닉)의 오사카 공장을 방문했다. 덩샤오핑은 당시 공장 견학을 안내한 마쓰시다 회장에게 “당신은 관리의 신으로 불린다. 중국의 경제현대화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중국경제는 문화혁명 여파로 폐허 상태였다.

닛케이아시아 최신호에 따르면 당시 마쓰시다는 덩샤오핑의 요청에 운명적으로 동의했다. 이듬해 그는 중국 베이징에서 공장노동자들을 불러모아 “당신들은 TV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매우 열심히 일하고 있다. 계속 노력하면 수년 내 일본을 따라잡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1987년 파나소닉은 일본기업 중 처음으로 베이징에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중국노동자 250명을 일본에서 반년 동안 훈련시켰다. 1989년 마침내 중국에서 첫 제품을 생산했다. 아쉽지만 그는 살아생전 이 거래의 결실을 보지 못했다. 오늘날 파나소닉 중국사업부 매출은 1조7000억엔(160억달러), 회사 전체매출의 1/4을 차지한다.

닛케이는 “마쓰시다의 선견지명으로 파나소닉은 최대시장 중 하나를 일궜지만 한편으론 가장 무서운 경쟁자를 키운 셈이 됐다”며 “중국은 현재 전세계 냉장고와 세탁기의 절반, 에어컨의 85%를 생산한다. 중국 본토 기업인 메이디와 하이얼은 글로벌 가전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일본기업들은 한참 뒤쳐졌다”고 전했다.

파나소닉 직원 혼마 테츠로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지켜봤다. 그는 1986년 직원 중 처음으로 중국어를 배웠다. 중국사업 진출에 대비하면서다. 그는 현재 ‘파나소닉 중국·동북아컴퍼니’ 대표다. 그는 파나소닉의 102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 가전부문 본사, 또는 최소한 글로벌사업 일부를 중국으로 이전할지 말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혼마 대표는 닛케이에 “일본시장에서 주로 활동했다. 우리 회사의 최대시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고 말했다. 파나소닉은 2019년 중국·동북아컴퍼니를 출범시켰다. 중국 내 5만2000명의 임직원과 약 80개의 자회사를 거느렸다. 이는 파나소닉이 미중 무역전쟁을 넘어, 그리고 향후 10~20년을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나소닉의 기술은 여전히 중국기업들을 앞선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일 뿐이다. 한때 중국시장을 지배했던 파나소닉은 이제 고급제품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데 고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지난해 8월 출시한 ‘EH-XD30’이다. 와이파이를 장착해 스마트폰과 연결할 수 있는 620달러 헤어드라이어다. 주변 대기의 자외선과 습도에 맞춰 모발에 불어넣는 전자입자를 조절한다. 두피와 모발의 상태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스마트 토일렛도 있다. 사용자가 볼일을 보는 동안 대·소변과 체지방을 측정해 스마트폰으로 건강정보를 보내준다.

혼마 대표는 “일본 소비자들은 낯선 것을 꺼리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중국 소비자들은 새로운 상품, 새로운 기술에 열려 있다”며 “최첨단 제품을 내놓지 않으면 중국 소비자의 관심을 끌 수 없다”고 말했다.

시장의 압박, 줄어드는 격차

중국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파나소닉의 결정은 전세계 최대시장을 놓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동시에 중국에 기술을 넘겨주면서도 여전히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지난 40여년의 자신감이 한몫했다.

물론 격차는 계속 줄어든다. 독일 자동차업체든 미국 이동통신장비업체든 대부분 다국적 기업들도 같은 배를 탔다. 그들은 중국의 규정에 따라 사업한다. 시장에 진출하는 대가로 기술을 넘겨준다.

일본무역진흥회(제트로) 연구원인 케딩은 “중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은 수입관세, 운송비를 줄이기 위해 현지에서 부품을 조달한다. 부품 생산과 관련해 중국업체를 훈련시켜 공급망을 짠다”고 말했다. 외국기업들은 현지 임직원의 훈련장이기도 하다. 이들은 퇴사 후 따로 회사를 차리거나 중국경쟁업체에 스카우트 된다.

케딩은 “그럼에도 일본기업들은 여전히 중국시장을 고수한다. 급성장하는 중국시장은 선진국의 성숙한 시장보다 더 매력적이다.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다. 더 많은 연구개발비를 책정해 경쟁에서 계속 앞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기업들이 중국에 투자하는 또 다른 이유는 광대하고 정교한 공급망 때문이다. 자동차와 같은 복잡한 제품은 수많은 부품, 촘촘한 공급망을 전제한다. 중국이 최적지다.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가 전도유망하지만 아직 멀었다. 케딩은 “동남아시아로 공장을 옮긴 일본기업들도 종종 중국에서 부품을 조달한다. 해당 부품을 납품하는 현지 공급업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장진출과 기술을 교환하면서 쓰라린 결과를 얻었다. 일본 오토바이와 고속철도, 가전 등의 부문은 중국이라는 강력한 글로벌 경쟁자와 마주하고 있다. 중국에 투자하는 다른 산업부문도 당연히 이 선례를 따를 것이다.

세계 1위 콘덴서 제조사인 일본 ‘무라타제작소’의 나카지마 노리오 대표는 “우리는 중국에 3~4년 앞섰다”며 “하지만 그들의 추격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콘덴서는 전압을 일정하게 유지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민감한 전자부품을 보호하는 부품이다.

닛케이는 “파나소닉 사례는 아시아 1, 2대 경제강국의 운명이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0년 일본 경제규모는 중국의 4배였다. 2010년 중국은 일본을 제쳤다. 오늘날 중국 경제는 일본의 3배 규모”라며 “일본과 미국 정부가 강하게 압박하지만 일본기업들은 중국시장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전했다. 제트로가 지난해 9월 조사한 결과 중국에서 사업하는 일본기업 중 7.2%만 중국공장을 타국으로 옮겼거나 옮길 생각이라고 답했다. 2019년 같은 조사에선 9.2%였다.

다이와총합연구소 수석연구원인 사이토 나오토는 “지정학적 리스크 때문에 일본기업은 중국에 대해 합리적인 한계를 설정하려 한다. 과도한 의존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기업들은 사실상 중국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기업들이 중국시장을 완전 배제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파나소닉과 대비되는 사례는 도요타다. 1978년 덩샤오핑이 일본 방문에서 돌아온 뒤, 중국정부는 도요타에 ‘중국에 공장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도요타는 거절했다. 대신 미국공장에 집중하는 방안을 택했다. 현재 도요타는 당시 결정을 역대급 전략적 실수로 보고 있다.

중국 외면했던 도요타의 전략적 실수

1994년 도요타는 뒤늦게 중국시장 진출 계획을 선언했다. 하지만 2000년이 돼서야 톈진에 첫번째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매출이 증명한다. 경쟁사인 혼다와 닛산의 2020회계연도에서 중국매출 비중은 약 30%다. 같은 기간 도요타는 18%에 그쳤다.

도요타는 두번째 기회를 잡았다. 중국 리커창 총리가 2018년 도요타 홋카이도공장을 방문했다. 리 총리는 도요타의 수소연료전지차에 큰 관심을 보였다. 중국의 대기오염 정화에 핵심적인 기술이기 때문이었다. 도요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회사 한 경영진은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도요타는 지난해 6월 수소연료 상용차 개발을 위해 중국기업 5곳과 합작했다. 10월엔 광저우자동차그룹(GAC)에 하이브리드 전기차 시스템을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외국기업엔 처음 공급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도요타는 렉서스 전기차와 순수전기 SUV차량을 일본에 앞서 중국에서 처음 출시했다.

도요타는 2019년 중국 자율주행 스타트업 2곳과 협약을 맺었다. ‘샤오마즈싱’(Pony.ai)과는 자율주행 도로시험을, ‘추쑤두’(Momenta)와는 자율주행 솔루션을 협업중이다. 같은해 ‘아폴로 프로젝트’에도 합류했다. 중국 인터넷기업 바이두가 선봉에 선 자율주행 플랫폼 개발 사업이다.

이는 양날의 칼이다. 중국시장에 초점을 맞춰 제품을 공급해야 하는 한편 미국이 개발한 기술을 중국에 이전하는 부담스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도요타 관계자는 “우리는 현지생산을 계속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도요타는 중국 외의 시장에도 투자하면서 리스크를 분산하고 있다. 도요타는 협력사인 스즈키모터와 함께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선 도요타 자회사 ‘다이하쓰’가 활약한다. 인도네시아 자동차 상당수는 다이하쓰가 생산한다. 말레이시아에선 다이하쓰가 출자한 ‘페로두아’가 최대 자동차회사다.

중국에 진출한 많은 외국계기업들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친다. 중국과 기술을 공유하면서도 여전히 앞설 수 있다는 것. 대표적인 기업은 교토 소재 ‘일본전산’(NIDEC)이다. 세계최대 모터 제조사로, 중국에 대거 투자하고 있다. 급증하는 전기차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다.

일본전산의 목표는 2030년 글로벌 전기차 모터 수요의 40~45%를 거머쥔다는 것. 이러한 목표달성 과정에서 중국시장을 대체할 곳은 없다. 중국에 달린 이해관계가 매우 크기에, 일본전산은 '중국 내 생산시설을 다각화하라'는 정부의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다.

일본전산의 다롄공장은 중국 2대 생산기지 중 하나로, 1992년 처음 진출했다. 이곳에 10억달러 가까이 들여 전기차 모터생산을 위한 2번째 생산라인을 건설중이다. 1000명의 직원이 입주할 연구개발시설도 짓고 있다. 두 시설 모두 올해 본격 가동된다.

일본전산 나가모리 시게노부 대표이사 회장은 "남들과 다른 일을 해야 앞설 수 있다"며 "중국은 일본전산의 최대 시장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면서도 중국과 가까운 베트남, 필리핀 등에 생산시설을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과 베트남이 1995년 국교수립을 하기 전부터 베트남에서 사업을 벌였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베트남에 갔기 때문에 나는 강력한 산업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가모리 회장은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다. 트럼프는 나가모리에게 "중국에 너무 치우친 것 아니냐"며 비난했다. 그는 "일본전산은 중국에 투자하는 만큼 미국에도 투자하고 있다"고 응수했다.

그는 "일본은 중국의 부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중국이 모든 것을 다 잘하는 건 아니다"라며 "나는 이탈리아 넥타이를 매고 있다. 일본제품은 맘에 들지 않는다. 독특함이 강점이다. 일본이 중국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점진적인 디커플링

모든 이가 나가모리 회장처럼 낙관적인 건 아니다. 무라타제작소 나카지마 대표는 "일본은 제조업에 강점을 갖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중국 제품과 차별화하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가전부문이 그렇다"며 "중국은 돈이 많다. 노동력이 풍부하다. 인재들도 넘쳐난다. 추격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은 연구개발과 장기적인 투자에 더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무타라제작소의 콘덴서는 1990년대 말 휴대폰이 대중화되면서 수요가 급증했다. 무라타는 2000년대 일본 가전기업들을 따라 중국 사업을 확장했다. 오늘날 무라타의 고객은 일본 가전기업을 넘어선다. 애플과 삼성전자는 물론 중국 화웨이와 샤오미, 오포, 비보까지 모두 무라타의 제품을 이용한다. 중화권(중국·대만·홍콩)은 무라타 매출의 절반을 넘는다.

하지만 미중 무역전쟁이 무라타의 성장전략을 꼬이게 만들었다. 나카지마 대표는 탈동조된 세상이 등장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미국 바이든행정부도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지속한다면 세계는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시장은 너무 광활해서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곳"이라며 "시장의 크기와 성장의 속도를 고려하면 서구·일본시장과 함께 중국시장에서도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일부 전자기기는 미국 부품없이 제조하기 어렵다. 컴퓨터 기반 설계도구가 대표적이다. 중국에 공급하기 위해, 다른 나라가 만든 대체장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탈동조화하는 세계에서 일본정부는 자국기업들에게 '중국에서 빨리 나오라', '중국시장을 고수한다면 근시안적인 태도'라고 경고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의 경제안보 고위관료는 "중국 경제성장의 속도는 둔화되고 있다. 일본기업들은 동남아시아와 인도라는 차세대 성장엔진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중 무역전쟁은 예측불가능성을 높였다. 중국에서 만드는 제품의 관세가 높아졌고, 중국에 수출하는 제품에 미국부품과 장비의 활용이 금지됐다. 비디오게임 제작사 닌텐도와 다기능 프린터 제조사인 샤프, 리코, 교세라 등 일부 일본 제조기업들은 생산시설을 베트남과 태국으로 옮겼다. 미국의 화웨이 제재는 일본 반도체기업들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겼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해 9월 미국기술로 만든 제품을 화웨이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일본의 많은 기업들은 이런 조치가 확대될 것을 우려한다. 중국 최대 이동통신 장비업체를 잃은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다른 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영국 시장동향조사기업 '옴디아'에 따르면 일본기업들은 2020년 화웨이에 약 120억달러의 부품을 수출했다.

불확실성의 또 다른 원천은 지정학적 환경이다. 동중국해에서 중일 양국의 영토분쟁은 언제라도 격화될 수 있다. 경제산업성 관료는 "중국과의 영토분쟁이 다시 불거지면 일본기업들은 중국시장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나소닉은 미래를 계획할 때 미중 갈등관계를 늘 염두에 둔다. 파나소닉은 산업로봇이나 전자기기 등 산업재를 생산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가전에 집중한다. 혼마 대표는 "중국·동북아컴포니를 설립했을 때 미중 갈등을 고려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전과 가정용 장비 등 민감한 기술을 포함하지 않는 사업을 떼어내 중국에 가져갔다"며 "중국시장에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베이징에 거주하는 혼마 대표는 실시간 스트리밍 전자상거래 프로그램에서 중국어를 구사하며 파나소닉 제품을 직접 홍보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에서 팔린 파나소닉 가전의 51%는 온라인에서 거래됐다. 전년 대비 7%p 상승했다.

일본에선 영업사원이 백화점 등 대형 매장에서 직접 파나소닉 제품을 홍보한다. 중국에선 영업사원이 컴퓨터 스크린 앞에서 제품을 홍보한다. 헤어드라이어나 전기면도기 등 파나소닉 제품을 찾는 고객들과 전자상거래 사이트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혼마 대표는 "중국은 매우 운이 좋았다. 최근까지 정치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도 원하는 무엇이든 미국에 수출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은 지난 50년 동안 미국과 무역마찰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경제를 대규모 제조에 최적화시켰고 대규모 투자와 생산, 수출에 자원을 집중했다"며 "이제 그러한 시대는 저물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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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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