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 발언 놓고 '속도조절' 해석 논란

4차 재난지원금 당·정 갈등에도 거리두기

사면 찬반 국론분열 뒤에야 "말할 때 아냐"

"임기말 리스크 관리 치중, 무책임으로 비쳐"

"대통령께서도 그렇고 저도 속도조절이라는 표현을 쓴 적 없다."(박범계 법무부 장관)

"박 장관이 임명장을 받으러 온 날 대통령께서 속도조절을 당부했다."(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
답변하는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 |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사헌 기자


검찰개혁과 관련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박 장관과 유 실장의 해석이 엇갈리면서 혼선을 빚고 있다. 발단은 2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무부 업무보고였다. 이날 박 장관은 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을 당시 "올해부터 시행된 수사권 개혁의 안착과 반부패 수사 역량이 후퇴돼서는 안된다는 대통령의 말씀이 있었다"고 했다. 박 장관이 전한 문 대통령의 발언은 여당이 추진하는 검찰개혁에 속도조절을 주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민주당 초선의원들이 중대범죄수사청 공청회를 열고 강경 목소리를 내면서 당청간 이견이 있는 것으로 비쳐지자 박 장관이 진화에 나섰다. 그는 24일 대전보호관찰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일부 언론에서 속도조절론이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려 다루는 듯하다"면서 "제가 대통령의 당부를 속도조절로 표현하지 않았고 대통령께서도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더불어민주당 당론으로 의견이 모아지면 따를 것"이라고도 했다. 검찰개혁의 속도를 놓고 당청간 이견이 없으며 여당이 결정하면 수용하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같은 날 국회 운영위원회 청와대 업무보고에 참석한 유영민 실장은 속도조절을 당부하는 취지의 대통령 말씀이 있었다며 박 장관과는 정반대의 얘기를 했다. 운영위원장인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가 "대통령의 정확한 워딩이 '속도조절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제동을 걸었지만 유 실장은 "정확한 워딩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의미의 표현을 하셨다는 것"이라고 재차 확인했다. 유 실장은 회의 막바지에 "속도조절이라는 표현은 아니다"라며 "현재 검찰개혁, 권력기관 개혁안이 잘 안착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 속도조절이라는 것으로 언론에 나온 것이지 그 워딩은 없었다"고 뒤늦게 수습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대통령의 의중과 달리 민주당이 검찰개혁의 속도를 내는 것으로 비쳐지면서 '당청간 엇박자', '레임덕'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문 대통령의 모호한 메시지로 혼선을 빚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이달 8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4차 재난지원금과 관련해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과감하게 실기하지 않고 충분한 위기 극복방안을 강구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한 발언을 둘러싼 논란도 그 중 하나다.

당시 4차 재난지원금을 놓고 민주당은 '보편·선별 동시지급'을 주장하고 기획재정부는 이에 반대하면서 갈등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문 대통령이 '가르마'를 타 줄 것을 기대했지만 메시지는 분명치 않았다. '재정 감당 범위'를 언급해 기재부에 힘을 실어주면서도 "현실적인 여건 속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며 청와대는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인 까닭이다. 민주당에서는 다음 날 "문 대통령의 말씀과 내용이 그동안 당이 밝힌 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해석을 내놓고 "선별·보편 지급을 함께 추진할 것"이라고 했었다.

연초 불거진 이명박·박근혜 사면 논란에서 보인 문 대통령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제기한 데에는 문 대통령의 의중이 담겼을 것이란 관측이 많았지만 문 대통령은 한동안 침묵했다. 사면 찬반을 놓고 국론이 분열됐지만 문 대통령은 보름여가 지나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이 모든 국정 사안에 대해 일일이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최근 주요 현안에 대한 불분명한 태도로 혼선이 반복되다보니 무책임하게 보인다는 지적이 나온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소장은 "문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리스크 관리에 치중하다보니 메시지가 불분명해지는 것 같다"며 "임기 말 위험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지만 자칫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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