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석 기상청장

5월 19일은 발명의 날이다. 국민에게 발명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1957년에 지정된 기념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23년 4월 29일, 양력 5월 19일 측우기 기록이 있다. 거북선 금속활자 등 다수의 발명품이 있지만 명확한 기록이 있는 측우기 사례로 기념일을 정했다고 한다. 측우기라 하면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 기기고, 서양보다 200여년 앞선 발명품이라는 점을 떠올린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측우기가 지닌 선조들의 과학적 사고와 기상데이터 축적의 역사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자연현상 판별 넘어 공평 과세에 기여

우리 선조들은 기상현상을 땅과 인간에 대한 하늘의 이치로 여겨왔다. 하늘의 징조는 하늘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에 대한 천명으로 받아들였고, 특이한 기상현상을 재이(災異)라고 해 왕의 통치에 대한 일종의 경고로 이해했다.

세종 23년(1441년) 4월 26일, 세종은 황우(黃雨 누런비)가 내렸다는 보고를 접하고 이를 재이로 여겨 국정을 반성하고 죄인을 사면하는 등 정책을 쇄신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용, 1418~1453년)은 이 비는 송화가루가 비에 섞여 내린 자연적 현상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빗물을 받는 그릇’의 물이 누렇지 않고 노란 가루가 섞여있다는 것이다. 4월 29일, 세종은 신료들과 논의해 황우를 자연현상으로 간주하고 국정혼란을 방지할 수 있었다. 당시 ‘빗물을 받는 그릇’은 바로 세자 이 향(훗날 문종, 1414~1452년)이 우량 측정을 개선하고자 고안한 측우기였다.

이듬해 1442년 세종이 호조(재정 담당관청)의 건의로 측우기를 경복궁 서운관 뜰과 전국 8도 감영에 설치하면서 측우제도가 시행되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측우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영조 46년 (1770년) 재정비되었다. 호조는 지역별 기록으로 가뭄 홍수 풍년 흉년 등을 판단했고 세금감면 자료에도 활용했다. 측우기는 자연현상 판별, 나아가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려 공평한 과세기준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다.

최첨단 장비 개발에도 빛나는 창의정신

측우제도는 수령이 파견된 전국 330여 부(府)·군(郡)·현(縣)으로 확대됐다. 각 도 감영의 감사는 지방관아의 강우량을 정리해 중앙관서에 일괄 보고했으니, 도성뿐만 아니라 전국 현황을 알 수 있게 됐다. 강우 측정도 세부적으로 비의 시작 시각과 그친 시각을 적고, 척(尺)·촌(寸)·분(分) 단위로 기록했다. 비의 강도도 미우(微雨)부터 폭우(暴雨)까지 8단계로 세분화했고, 1800년 부터는 매월 통계치를 작성했다.

서울에 1821년(2566㎜)과 1879년(2462 ㎜)에 많은 비가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통계 때문이다. 당시 기록은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공주충청감영측우기(1837년)와 대구경상감영측우대(1770년)는 국보 제329호, 제330호로 지정돼 국립기상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 측우기보다 200여년 앞선 최초의 발명이지만, 측정기록과 측우제도도 유례없는 것이다. 600여년 전의 측우기와 측우제도는 자동관측장비 레이더 위성 등 최첨단 장비로 고도화되었지만, 우리 선조들이 구축해 온 체계적 데이터 수집·관리체계는 지금도 변함없다.

운치있게 내리는 봄비 속에 우리 선조들의 창의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는, 발명을 넘어 그 이상을 꿈꿔온 측우기를 오늘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