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패전에서 일어나 선진국으로 '질주' … 2020년, 코로나·후진적 권력시스템에 '휘청'

"나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일본 여자배구가 우승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젊은이들이 그런 체험을 하길 원한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지난달 국회에서 야당 대표들과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올림픽의 취소나 연기를 요구하는 야당에 1964년 도쿄올림픽의 기억을 소환한 것이다.

'동양의 마녀'로 불린 일본 여자배구팀은 1964년 올림픽에서 당시 세계 최강인 소련을 누르고 금메달을 땄다. 서양 선수들에 비해 크게 작은 체구를 가진 일본 여자배구의 우승은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선진국으로 웅비하는 일본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스가 총리가 21일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언급을 한 데서 알수 있듯 이번 올림픽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부흥하려는 일본 집권 엘리트그룹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도쿄-오사카 신칸센 개통

일본 여자배구의 우승은 체격은 작지만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팀이 톱니바퀴 같은 조직력과 빠른 속도로 세계를 재패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전후 일본경제의 모델과 비슷했다.

일본은 냉전체제의 한복판에서 경제 재건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에 매진한다'는 이른바 '요시다 독트린'을 전후 국가의 기본 방침으로 내건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확보한 실탄을 무기로 본격적인 고도경제성장기(1955~1973년)에 들어선다. 그 한 복판에 1964년 도쿄올림픽이 자리잡았다.


올림픽 개막 9일 전 도쿄에서 오사카를 잇는 초고속열차 '신칸센'이 개통됐다. 전세계 처음으로 최고시속 285㎞의 초고속열차시대를 연 것은 해마다 10% 안팎의 실질GDP 성장을 구가한,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일본의 모습을 상징했다. 일본정부는 하네다 국제공항을 정비하고,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고속도로 및 지하철의 연장과 개보수 등 교통인프라에 집중했다.

일본경제연구센터(JCER)가 2018년 발표한 '1964년과 비교한 2020년 도쿄올림픽 경제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대회시설과 인프라 투자에 9870억엔을 썼다. 1964년 일본 명목GDP(31조5670억엔)의 3.1%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는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들어간 투자액이 GDP 대비 0.5% 안팎임을 고려하면, 6배 이상의 규모에 해당한다. 당시 인프라투자는 1960년대 일본 경제의 빠른 성장에 걸맞는 물류 및 교통망 확충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코미네 타카오 다이쇼대학 교수는 지난달 JCER에 기고한 글에서 "1964년 도쿄올림픽은 사회자본의 완성을 촉진하는 목표가 됐다. 올림픽이란 깃발을 들고 공공투자를 추진할 수 있는 근거를 국민에게 쉽게 알리고 이해를 구할 수 있었다"면서 "당시 도쿄올림픽은 일본이 국제적으로 데뷔하는 장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렸을 당시 NHK가 조사한 결과 '올림픽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도쿄 시민은 60.6%로 압도적 지지를 보였다. 대회를 마친 이후 조사에서도 '올림픽은 일본에 큰 도움이 됐다'는 답변이 89.9%에 달했다.

올림픽 4년 후 세계경제 '빅2'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세이코는 대회 공식시계로 채택됐다. 육상을 비롯한 순간의 기록을 다투는 경기에서 세이코 시계는 판정에서 다툼의 여지를 없애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소수점 이하까지 정확한 측정이 가능해지면서 세이코는 전세계인에게 일본의 정밀기계산업을 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빠르면서도 정확한 '동양의 마녀' 여자배구와 같이 일본의 기업과 상품에 대한 이미지 제고에 기여했다.

당시 올림픽은 일본의 내수산업 활성화를 크게 촉진했다. 1950년대 후반 고도경제성장기 초입에 흑백TV와 냉장고, 세탁기 등 이른바 '3종의 신기'(일본 왕실이 보유한 칼, 구슬, 거울을 빗댄 신조어)를 중심으로 내구재가 급속히 확산됐는데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소비의 질적인 도약까지 이루게 됐다. 일본의 흑백TV 보급률은 1959년 23.6%에서 1964년 87.8%로 늘었고, 당시는 고가였던 컬러TV의 본격적인 보급이 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됐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컬러TV와 에어컨, 자동차 등 '신3종의 신기'가 일본 가정에 널리 보급돼 내수시장의 폭발적 성장을 불러왔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거침없이 질주했다. 1960년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연평균 10%를 넘는 초고속 성장을 달성했다. 일본은 드디어 1968년 당시 서독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이케다 하야토 총리는 1960년 "10년 안에 국민소득을 두배로 올리겠다"며 '소득배증계획'을 발표했는데, 당초 목표보다 3년 빠르게 이를 달성했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와 1972년 제11회 삿포로 동계올림픽도 고도성장기 일본의 국토균형발전과 내수시장 창출, 일본 기업의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코미네 교수는 "1964년 도쿄올림픽으로 일본이 국제사회에 데뷔한 것과 같이 1988년 서울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으로 한국과 중국도 신흥국으로서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부흥올림픽에서 도박올림픽으로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을 통해 2011년 3.11동일본대지진의 참사를 딛고 새롭게 부활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보다 근본적으로 1990년대 초 버블경제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의 침체를 딛고 경제적·사회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노렸다. 그러나 한번 쇠락의 길에 들어선 일본사회가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부흥을 이뤄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인구구조가 심각하다. 1964년 올림픽 당시 합계 출산율은 2.05명이었다. 1971년 태어난 신생아는 200만명을 넘었다. 하지만 일본은 2010년대 들어 절대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합계 출산율은 1.34명, 신생아는 84만명에 그쳤다. 실질GDP 성장률도 바닥이다. 최근 2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지난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4.6%라는 전후 최악의 역성장을 기록했다.

도요타 자동차를 비롯해 견실한 소재·부품기업이 일본경제를 떠받치고 있지만 뒤처진 디지털경제를 만회하는 건 버거워 보인다. 비즈니스위크지에 따르면 1989년 전세계 기업 시가총액 상위 10위에 일본 기업이 7개를 석권했지만, 2019년엔 도요타가 35위권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미래도 암담하다. 후생노동성은 최근 2040년 일본의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3920만명을 넘어 이들을 간병하거나 보호해야 할 인력 270만명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부족인원이 69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끔찍한 추계를 내놨다. 일본경제연구센터는 일본이 최악의 시나리오로 갈 경우 이르면 2029년부터 영구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이라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IMF는 일본이 2040년 구매력 기준으로 세계경제 순위 7위로 전락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물론 일본은 고도성장기 쌓아 놓은 기업과 가계의 막대한 부가 있다. 일본은행의 자금순환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가계 금융자산은 1948조엔으로, 우리 돈 2경원이 넘는 엄청난 부를 쌓아놓고 있다. 기업도 해외에 막대한 투자자산을 가지고 있다. 도요타는 여전히 건재하고, 소니와 NEC 등 전통의 일본 기업들은 부활 조짐을 보인다. 일본 정부는 올해 하반기 내각에 '디지털청'을 설립해 범정부 차원에서 디지털경제를 촉진한다는 계획도 내놨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이 일본의 부흥보다 쇠락을 확인하는 행사가 될 조짐이 짙다. 집권세력의 미숙한 코로나19 대처는 잦은 긴급사태 발령과 해제의 반복으로 국민적 분노를 사고 있다. 압도적인 다수가 올림픽 개최를 반대해도 집권세력은 꿈쩍도 안한다. 일본의 후진적 의사결정 시스템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분석도 있다. 아사히신문이 지난 17~18일 조사한 결과, 스가내각 지지율은 31%로 출범 후 최저치를 보였다. 차기 자민당 총재로 스가 총리를 지지한다는 답변도 14%에 불과했다.

한편 집권층 일각에서는 올림픽이 시작되고 일본 선수단이 금메달 사냥에 나서면 여론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일본 선수단은 이번 올림픽에서 역대 최다인 30개의 금메달을 획득해 미국과 중국에 이어 종합3위의 성적을 노린다. 유달리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는 일본 국민들이 1964년 '동양의 마녀'와 같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선수와 대회관계자 등 87명 이상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상황에서 폐회식까지 경기 일정이 제대로 치러질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부 일본 언론은 이번 도쿄올림픽이 갈수록 '부흥'이 아닌 '도박'으로 바뀌는 양상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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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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